수능, 미련 가득한 그 이름이여
간만에 저녁 약속.
어쩐 일인지 저녁에 보자고 했다.
뭔가 좋은 예감이 들었지만 어설픈 설레발 잘 참아냈다.
드디어 디데이!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역시나 합격 턱이었다.
딸이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했다고.
도대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면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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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날은 매 해 어김없이 잘도 찾아온다.
십 년이 뭐야 이십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수능은 여전히 떨리며 가슴을 조여 온다.
왜 하필 그 날이 생리 둘째 날이었을까.
왜 하필 그 날 점심 도시락은 그토록 맛이 없었을까.
왜 하필 옆 줄에 앉았던 그 아이는 1교시 시험
시작도 전에 꺼이꺼이 울어대
시험실 분위기를 초상집으로 만들었던 걸까.
첫 쓰라린 기억을 안겨준 수능.
그렇게 찾아온 인생의 첫 실패는
후회의 뒷맛을 오래도 남기고 있다.
수능 가채점 후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학창 시절 쌓아온 모든 게 무너져
내 온몸을 짓눌러 며칠간이나 침대에 누워 울다
그냥 이대로 땅으로 꺼졌으면.
가장 마음이 시렸던
엄마의 한숨과 아빠의 어설픈 위로.
끊임없이 걸려오는 친척과 지인들 벨소리에
모든 사람들 머릿속에서
내 이름 석 자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때 누구라도 나한테
별 거 아냐, 첫 실패 축하해.
이제야 실패의 쓴 맛을 경험해보다니 다 컸네.
인생은 사실 이 거 보다 훨씬 더 쓰다.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해봐.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었다면.
다 내 눈치 보느라 쉬쉬 할 게 아니라.
실패의 경험만큼 너를 단단하게 하는 건 없다고.
너를 믿고 다시 일어 서보라고 말해주었다면.
처음 겪는 시련에 나 조차도 나를 믿지 못했고
마음속 무겁게 가라앉은 돌덩이는 자꾸 나를
밑으로 또 더 밑으로 끌어내렸다.
일 년 더 했는데 그때도 이러면 어떡하지?
사실 이게 내 실력이었다면?
그동안 그냥 운이 좋았던 거라면?
그래서 도망갔다.
꿈이고 나발이고.
그냥 점수에 걸리는 대학 중 아무 데나.
이게 운명인가 보지 뭐.
나는 원래 여기 까지였나 보지 뭐.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게 인생에서의 첫 실패였던 거 같다. 다시 그 실패를 마주하기엔 너무 두려웠기에 피하기만 한 듯하다.
실패는
머리엔 트라우마를 가슴엔 컴플렉스를 새겼고
뒤통수엔 후회를 남겼나. 아직도 자꾸 뒤돌아본다.
그때 내가 이랬으면...
아니면 저랬다면...
그래서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원하는 학교에 가게 된 기분.
그때 나에게 회복탄력성이 1%라도 있었다면.
가는 데 까지 가보자 하는 담대한 마음이 있었다면.
실패를 위로가 아닌 축하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아니 다 핑계고
그냥 내가 내 자신을 믿었다면.
내 자존감을 주위의 말들로 쌓아 올릴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마음으로 단단하게 다졌었다면
이십 년 지난 지금
뭐 그때 난 해 볼만큼 다 해봤노라고
최소한 말은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최선이었으니
이게 내 길이고 내 운명이라고 보다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