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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Dec 31. 2020

[퀸스갬빗리뷰] 베스에게 전하는 편지

from 졸린



안녕! 베스 하먼.
지난주에 네가 러시아 오픈 빌려 간 돈 갚은 거 확인했어. 사실 돌려받게 되리라곤 한 50%만 기대했던 것 같아. 널 못 믿어서라기 보다 내 베프가 세계적 챔피언이라니 너무 굉장하잖아!

넌 기억할까 우리 첫 만남.
고아원에 들어오는 여느 아이들과 넌 눈빛부터 달랐지.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나봐. 네게 초록색 알약의 비밀을 먼저 말해준 것도 나였잖아. 말해주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걸.
그랬다면 네 삶이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

네가 입양되던 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언제고 우리 서로 헤어질 날이 오리란 건 알았지만 그렇게 갑자기 올 줄은.


그래서 숨겼지 네가 아끼던 체스 책. 그래도 그렇게 이사 다니면서도 끝까지 그 책만은 잃어버리지 않고 챙겼다. 언젠간 널 만나 주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넷플릭스 퀸스갬빗


그러던 어느 날 샤이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 바로 네가 생각났어. 네게 처음 체스를 가르쳐 준 분이 할아버지시니깐.

슬픈 소식이 아이러니하게도 반가운 소식이 되어 버렸지. 널 찾아갈 빌미가 되어 주었거든.

고래등 같은 집 문을 열고 나오던 너. 여전히 그대로더라.
최초의 여성 체스 챔피언 소식을 전하기 바빴던 신문과 잡지에서 이미 네 사진을 수도 없이 봐서였을 수도.

그때 넌 술과 약물 중독으로 힘겨워했지. 파리 오픈에서 보르고프에게 그렇게 기권패 당하고 돌아와 낮과 밤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깨면 마시고 취하면 잠들고.

네가 많이 의지했던 새엄마 역시 그렇게나 가버리셨다는 말에 나도 함께 눈물을 쏟았지. 멕시코 오픈 후 돌아온 텅 빈 집. 테이블 새엄마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잔뜩 묻은 찻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 주인 잃은 찻잔. 그걸 보는 네 마음. 얼마나 찢어질 것 같았니.

근데 말이야. 미안해. ...
그런 너를 보며 조금은 위안을 받았어.

어릴 때부터 체스 신동  보면서  자괴감에 괴로웠거든. 똑같은 고아였지만 체스에 몰두해 있는 너를 볼 때면 너무나 부럽고도 샘났어. 무언가에게 그렇게나 마음을 빼앗긴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세상 다 가진 거 같은 너였는데 술독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너를 보니 완벽한 인간이란 없구나 조금은 위안이 되었어.

넷플릭스 퀸스갬빗

천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는  끊임없이 절망하고 때때로 하늘에 계신 조물주를 원망해야 하는 힘든 일이거든.

그래서였나봐. 처음엔 그렇게 비겁하게  자기 위로하기 급급했지. 그러다 정신 차려보니 힘겨워하는 네가 보이기 시작했어.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 널 데리고 서둘러 샤이벌 할아버지 장례식에 갔었지.


그때 돌아오던 길 우리 함께 들었던 노래, Jimmy Mack.
내 생애 그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을까.
목청 나가도록 힘껏 불러댔지.

언젠가 너의 친구 해리를 만난 적이 있어.

해리가 그러더라. 베스가 천재라 시기했냐고? 아니, 오히려 너와 트레이닝하면서 깨달았다고 하더라. 실력은 둘째치고 본인은 너만큼 체스를 사랑한  없는  같다고.

베스 하먼.
넌 네 주변인들에게 그런 존재였어.
타고난 신동에 심지어 노력하는 천재.
동네와 학교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체스 신동들은 물론이고 미국 전 챔피언들까지도 고개 숙이게 만들었지.

그래서 나도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밤마다 체스 책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침대에 누워서도 고아원 천장에 체스판을 상상하며 체스 두기를 멈추지 않았던 너를 보며 나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없었지.

월드 챔피언에 어울리는 친구가 되고 싶었나봐. 그래서 흑인에 고아에 아무것도 없는 내가 변호사까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넷플릭스 퀸스갬빗


베스.
내가 이 말 했던가? 진심으로 고맙다.
내 비겁한 자기 위안과 시샘을 용서해줘.

그리고 우리 지금까지 참 수고했다.
버려진 운명에 그 누구의 탓도 않고 참 잘 살아왔다.

네가 정말 힘든 순간 떠올리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게 
나 역시 괴로울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네가 될 수 있게 

망망대해 천애고아인 우리 둘,
서로 의지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가 보자.




너의 친구 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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