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다.
십 년 전에는 재수도 흔했다. 통번역대학원 입시 학원까지 있었더랬다. 나 역시 그 학원 4개월간 정말 열심히 다녔다. 코리아헤럴드라고. 을지로에 위치한 천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곳이었는데.
첫 시작은 태교였다.
평소처럼 만화책 잔뜩 빌려와 뒹굴뒹굴 읽고 있던 어느 주말 밤. 각종 오물에 더러워진 낡은 만화책 페이지를 넘기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나 혼자라면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자고 해도 문제없지만 뱃속 아이에겐 깨끗하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 뭐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무언갈 배워보면 어떨까 하던 참에 때마침 읽고 있었던 책 "10미터만 더 뛰어봐". 이런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당시엔 김영식이라는 저자분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한참 후에야 "남자한테 정말 좋은 데 설명할 길이 없네..." 그 유명한 CF의 주인공 회장님이라는 걸 알았다. 광고에서 본 이미지는 무대포 엉큼한 회장님이라 별로였는데 그분의 글에는 힘이 있었다.
내용인즉 200m 뛰라고 하면 포기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때 200m가 아닌 10m만 조금 더 힘을 내서 뛰어보자. 그럼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할 거라는 자서전 내지는 자기 계발서.
당시엔 꽤 마음에 들어 자소서 문구에 "10m만 더 뛰어봐"란 제목을 많이 활용하곤 했던 기억도 난다.
태교로 시작한 통번역대학원 입시 준비
여하튼 그래서 전공이었던 불어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혼자 하기엔 힘이 부칠 것 같아 목/토 일주일에 두 번 학원도 나가기 시작했다.
대학교 다닐 때도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돌이켜 보면 세상에서 번역 일이 가장 재미있었다. 일단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래서 골랐던 것 같다.
막상 다니기 시작하고서부터는 빠지고 싶은 유혹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지켜보는 눈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건 바로 남편의 존재.
화장한 주말 데이트하며 놀고 싶던 토요일도 꼬박꼬박 학원에 드롭해 주던 남편. 어쩔 땐 얄밉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남편 앞에서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겉으로나마 열심히 하는 척했던 것 같다.
태교 삼아 시작한 공부, 같은 학원 친구들에겐 중요한 인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당장 그해 있을 통역번역대학원 수험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
뭐든지 공부는 분위기를 타야 하나 보다. 이래서 많은 부모들이 강남 8 학군 하는 걸까. 엄근지 분위기에 휩쓸려 아이들 따라 스터디도 덩달아 시작했다.
그러다 9월 아이를 낳으며 9월, 10월, 11월까지 3개월은 학원을 갈 수 없었다. 시험은 당장 12월이었는데. 공부해 놓은 게 아깝다 싶었지만 이제 태교 할 필요도 없겠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 본업에 충실하자 마음먹었다.
그러다 시험 등록일 하루 전날, 같이 스터디하던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그냥 아까우니 한번 보라고. 붙든 떨어지든 그 자체로 의미 있을 거라고.
그 말에 용기 내어 아기 낳고 한 달 만의 나 홀로 외출을 감행했다. 부기도 덜 빠진 얼굴로 증명사진까지 찍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전했던 대학원 시험.
시험은 왜 늘... 쉽지 않을까?
드디어 결전의 그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울면서 돌아왔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아이 손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난 여기까지 인가보다.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처참하게 망쳤던 시험. 주제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여성 관련 주제였던 것 같은데.
평소 존경하던 그 분야 대가이신 교수님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인 게 두고두고 아쉬워 염치없게도 꼭 붙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만회할 수 있는 기회 다시 한번만이라도 갖게 해 달라고.
시험 망치고 돌아오던 버스 안. 버스 창에 머리를 박으며 이렇게 말할 걸 저렇게 통역할 걸 백만 번 후회하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로까지 생각의 꼬리가 이어졌다. 그래, 뭐든 꾸준히 열심히 하는 거면 나도 자신 있다, 그러니 시켜만 달라고.
이런 내 기도가 통한 걸까. 기적처럼 합격했다.
대학원 들어가서 접한 불어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불어가 아니었다. 신세계였다. 이제까지 내가 한 공부는 다 뭐였을까. 절로 두 손 모으며 겸손하게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얻었던 가장 값진 소득 중 하나.
세상은 넓고 대부분은 나보다 똑똑하구나 라는 깨달음.
태교엔 과연 도움이 되었던가.
5월부터 빠지지 않고 주욱 다녔으니 4개월 정말 열심히 했다. 출퇴근 시간마다 귀에는 늘 프랑스 뉴스를 달고 살았으며 틈만 나면 번역물을 꺼내 들었다.
퇴근 후나 주말엔 남편에게 한글 신문의 한 꼭지를 읽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남편 앞에서 해당 내용을 30초가량 불어로 통역하는 연습도 했다. (생각보다 이거 너무 부끄럽다.)
결국에 태교에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다. 남들은 임신하고 20킬로 기본으로 쪘다는데 십 킬로도 못(?) 쪘다. (고로 지금 내 살은 순전히 내 스스로 찐 거다.)
뭐 특별히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닐 시간도 없었다. 학원 다니느라 저녁 빼먹기도 일쑤였고 멍 때리며 여유를 갖기보다 항상 부지런히 시간 활용하려고 애썼다.
통역 모의시험 때는 긴장도 자주 했으니 아이가 뱃속에서 편치 않았을 거 같다. 게다가 회사도 예정일 바로 전날까지 출근하며 마지막 남은 힘 불살랐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첫아이임에도 2.6킬로로 예정일 하루 만에 바로 나왔다.
아이가 말을 알아들을 때쯤 언젠가 불어로 말을 건네 본 적 있다. 말 못 하는 어린아이였는데도 정색을 하는 게 느껴졌다.
그때 깨달았다.
통번역대학원 시험엔 합격했으나 정작 원래의 목적이었던 태교로선 처참하게 실패했음을.
***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올해 무언가 다른 도전을 꿈꾸고 계시다면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역량 있다고, 그대로 밀고 나가셔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어 몇 자 말한다는 게 이렇게 길어졌다.
학부 때 통번역대학원은 이중국적자나 해외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만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저 막연한 이상향.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막상 입시 학원에서 만난 나와 별다를 거 없어 보이던 사람들. 뭐든 한 꺼풀 벗겨보면 세상사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다.
그러니 생각만 하지 말고 문도 두드려보시라고.
할 수 없는 100 가지 이유보다
하고 싶은 1 가지 이유에만 집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