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백십 Jan 08. 2021

태교로 시작한 통번역대학원 입시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다.

십 년 전에는 재수도 흔했다.  통번역대학원 입시 학원까지 있었더랬다. 나 역시 그 학원 4개월간 정말 열심히 다녔다. 코리아헤럴드라고. 을지로에 위치한 천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곳이었는데.

 시작은 태교였다.

평소처럼  만화책 잔뜩 빌려와 뒹굴뒹굴 읽고 있던 어느 주말 밤. 각종 오물에 더러워진 낡은 만화책 페이지를 넘기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나 혼자라면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자고 해도 문제없지만 뱃속 아이에겐 깨끗하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 뭐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무언갈 배워보면 어떨까 하던 참에  때마침 읽고 있었던 책 "10미터만 더 뛰어봐".  이런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당시엔 김영식이라는 저자분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한참 후에야 "남자한테 정말 좋은 데 설명할 길이 없네..." 그 유명한 CF의 주인공 회장님이라는 걸 알았다. 광고에서 본 이미지는 무대포 엉큼한 회장님이라 별로였는데 그분의 글에는 힘이 있었다.

내용인즉 200m 뛰라고 하면 포기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때 200m가 아닌 10m만 조금 더 힘을 내서 뛰어보자. 그럼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할 거라는 자서전 내지는 자기 계발서.

당시엔 꽤 마음에 들어 자소서 문구에 "10m만 더 뛰어봐"란 제목을 많이 활용하곤 했던 기억도 난다.



태교로 시작한 통번역대학원 입시 준비



여하튼 그래서 전공이었던 불어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혼자 하기엔 힘이 부칠 것 같아 목/토 일주일에 두 번 학원도 나가기 시작했다.

대학교 다닐 때도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돌이켜 보면 세상에서 번역 일이 가장 재미있었다. 일단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래서 골랐던 것 같다.

막상 다니기 시작하고서부터는 빠지고 싶은 유혹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지켜보는 눈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건 바로 남편의 존재.

화장한 주말 데이트하며 놀고 싶던 토요일도 꼬박꼬박 학원에 드롭해 주던 남편. 어쩔 땐 얄밉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남편 앞에서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겉으로나마 열심히 하는 척했던 것 같다.


@kelysikkema / unsplash.com



태교 삼아 시작한 공부, 같은 학원 친구들에겐 중요한 인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당장 그해 있을 통역번역대학원 수험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

뭐든지 공부는  분위기를 타야 하나 보다. 이래서 많은 부모들이 강남 8 학군 하는 걸까.  엄근지 분위기에 휩쓸려 아이들 따라 스터디도 덩달아 시작했다.

그러다 9월 아이를 낳으며 9월, 10월, 11월까지 3개월은 학원을 갈 수 없었다. 시험은 당장 12월이었는데.  공부해 놓은 게 아깝다 싶었지만 이제 태교 할 필요도 없겠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 본업에 충실하자 마음먹었다.

그러다 시험 등록일 하루 전날, 같이 스터디하던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그냥 아까우니 한번 보라고.  붙든 떨어지든 그 자체로 의미 있을 거라고.

그 말에 용기 내어 아기 낳고  한 달 만의 나 홀로 외출을 감행했다. 부기도 덜 빠진 얼굴로 증명사진까지 찍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전했던 대학원 시험.



시험은 왜 늘... 쉽지 않을까?




드디어 결전의 그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울면서 돌아왔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아이 손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난 여기까지 인가보다.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처참하게 망쳤던 시험. 주제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여성 관련 주제였던 것 같은데.

평소 존경하던 그 분야 대가이신 교수님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인 게 두고두고 아쉬워 염치없게도 꼭 붙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만회할 수 있는 기회 다시 한번만이라도 갖게 해 달라고.

시험 망치고 돌아오던 버스 안.  버스 창에 머리를 박으며 이렇게 말할  저렇게 통역할  백만  후회하다  내가 과연 잘할  있는  뭘까? 로까지 생각의 꼬리가 이어졌다. 그래, 뭐든 꾸준히 열심히 하는 거면 나도 자신 있다, 그러니 시켜만 달라고.

이런 내 기도가 통한 걸까. 기적처럼 합격했다.

대학원 들어가서 접한 불어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불어가 아니었다. 신세계였다. 이제까지 내가 한 공부는 다 뭐였을까. 절로 두 손 모으며 겸손하게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얻었던 가장 값진 소득 중 하나.
세상은 넓고 대부분은 나보다 똑똑하구나 라는 깨달음.


@adityaromansa / unsplash.com


태교엔 과연 도움이 되었던가.



5월부터 빠지지 않고 주욱 다녔으니 4개월 정말 열심히 했다. 출퇴근 시간마다 귀에는 늘 프랑스 뉴스를 달고 살았으며 틈만 나면 번역물을 꺼내 들었다.

퇴근 후나 주말엔 남편에게 한글 신문의 한 꼭지를 읽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남편 앞에서 해당 내용을 30초가량 불어로 통역하는 연습도 했다. (생각보다 이거 너무 부끄럽다.)

결국에 태교에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다. 남들은 임신하고 20킬로 기본으로 쪘다는데 십 킬로도 못(?) 쪘다. (고로 지금 내 살은 순전히 내 스스로 찐 거다.)

뭐 특별히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닐 시간도 없었다. 학원 다니느라 저녁 빼먹기도 일쑤였고 멍 때리며 여유를 갖기보다 항상 부지런히 시간 활용하려고 애썼다.

통역 모의시험 때는 긴장도 자주 했으니 아이가 뱃속에서 편치 않았을 거 같다. 게다가 회사도 예정일 바로 전날까지 출근하며 마지막 남은  불살랐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첫아이임에도 2.6킬로로 예정일 하루 만에 바로 나왔다.

아이가 말을 알아들을 때쯤 언젠가 불어로 말을 건네 본 적 있다.    하는 어린아이였는데도 정색을 하는  느껴졌다.

그때 깨달았다.


통번역대학원 시험엔 합격했으나  정작 원래의 목적이었던 태교로선 처참하게 실패했음을.





***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올해 무언가  다른 도전을 꿈꾸고 계시다면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역량 있다고, 그대로 밀고 나가셔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어 몇 자 말한다는 게 이렇게 길어졌다.

학부 때 통번역대학원은 이중국적자나 해외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만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저 막연한 이상향.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막상 입시 학원에서 만난 나와 별다를  없어 보이던 사람들. 뭐든  꺼풀 벗겨보면 세상사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다.

그러니 생각만 하지 말고 문도 두드려보시라고.
할 수 없는 100 가지 이유보다 
하고 싶은 1 가지 이유에만 집중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Knockbox Coffee Compan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