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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Jan 15. 2021

통번역대학원에서는 뭘 배우나?


불어과?
왜 그렇게 전망도 없는 과를 갔어?


신입생 때 중국어과 선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


날아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벌게진 얼굴로 뭐라 변명 해대긴 했지만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던 그의 말.

맞는 말이다. 똑소리 나게 취업 잘 되는 과를 갔어야지 대체 언제적 불어과란 말인가.

대학교 4년 내내 그 사실을 절감했으면  그 이후엔 시류 방향 잘 탔어야지 왜 멀쩡한 회사 관두고  소위 전망도 어두운(?) 불어과,  그것도 대학원으로 유턴했을까.

나는 다를 거라는 착각?  선택에 대한 오기?
나는 특별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이제 와 돌이켜보건대 그냥 내 무덤 내가 판 꼴이었다.


@scottgraham / unsplash.com


공부는 다 때가 있다.


입시 준비는 애교였다. 스터디와 수업 준비부터 과제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그 와중에 육아와 살림까지.

왜 늘 아이 재우는 건 내 몫인지. 아홉 시부터 아이 재우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함께 잠이 들고 그렇게 하룻밤 공부치를 날리길 몇 번.

염치없게 방학 때도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스터디를 나갔다. 주변엔 온통 미안한 사람들뿐. 고마운 마음보다  부탁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이 쌓이고 쌓여 지치기도 했다.

공부는 다 때가 있다.

어릴 때 공부하라는 어른들 말씀 백번 옳다. 공부만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긴커녕 자랑스러워하고 대견해해 줄 때 공부해야 한다. 늙어서 공부하려면 일단 어린 학생들과 절대적인 시간 양 싸움에서부터 경쟁이 되지 않는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집안일 뒤로하고 책상에 앉을 때면 등 뒤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가끔은 공부하겠다고 먹은 마음 자체가 무척 이기적인 선택이었구나 느끼기도 했던  같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무작정 집 나가 산책로를 걸었다. 한강까지 이어지던 산책로.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혼자 걷는 그 시간이 참 힐링이었다. 그렇게 마음의 짐을 한강 서강대교의 불빛에다가 털어놓은 후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통번역대학원 수업의 구 할은 크리틱


글 제목을 <통번역대학원에서는 뭘 배우나?>로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와서 무언가를 새로 배우겠다는 기대는 접어 두시라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스스로 배우게" 도와줄 뿐이다.

통번역대학원 수업은 90%가 크리틱이다. 매번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통역 혹은 번역을 하면 나머지 동기와 교수님이 크리틱(문제 제기, 교정, 수정, 비평 정도?)을 한다.

좋은 말로 시작하지만 귓가에 남는 건 언제나 쓴소리.

다른 전공은 시험 결과 때까지 '나의 등수'가 정해지진 않지만 통역은 "말"이다. 실전이다. 매 수업 시간 겉으로만  모른 척할 뿐 서로가 다 아는  등수가 매겨진다.

감추고 싶었던 약점이 사정없이 까발려지고 벌거숭이가 되는 기분.  땅굴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 숨고 싶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 동기들이 평가하는 나의 민낯. 수업 시간에 눈물을 보이는 경우도 다반사다.  통번역 스킬이 아니라 단단한 마음가짐을 배우는 곳인가 싶었다.


@austindistel / unsplash.com


통번역대학원에서 배우는 스킬


1. 요약

첫 학기엔 주로 요약을 많이 한다. 2 페이지건 10 페이지건 한 꼭지의 기사나 논문을 무조건 5줄 이내로 본문과 다른 어휘를 사용해서 요약해야 한다.

연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통역에서 매우 중요한 스킬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휘의 범주가 엄청 넓어진다. 언어 실력을 조금 더 늘리고 싶은 분들께 강추하는 방법.

2. 문장 구역

시간제한을 두고 글을 읽으면서 바로 통역하는 것. 머릿속 인지한 내용을 말로 표현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모국어(A 언어)와  B 언어 혹은 C언어까지 뇌에서 입출력 스위치를 실시간 가동하는 것.

3. 뉴스 받아쓰기 

뉴스 한 꼭지, 일주일에 한 번 받아쓰기 하기. 앵커들은 대개 발음이 좋다. 또한 뉴스는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므로 굉장히 천천히 말하는 편이다.  다만  발음 뭉개며 말하는 중2병 걸린 사춘기 아이들 인터뷰에서 가끔 제동이 걸릴 뿐.

4. 노트 테이킹

순차 통역(연사가 말한 뒤에 통역하는 것)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노트 테이킹. 연사가 말한 걸 이해한 대로 노트에 적는 것이다. 예쁘게 쓰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 의식의 흐름대로 날려 쓴다.

빨리 쓰기 위해 펜 하나 살 때도 민감했던 거 같은데  다 부질없다. 잘 이해했으면 노트 테이킹 없이도 통역할 수 있어야 한다.

5. 연사 되기

제일 고된 준비였던 연사 되기. 통역 연습을 하려면 누군가는 연사(발표자)가 되어야 한다. 통번역대학원은 인원이 적으니 누구나 1주일에 한 번은 해야 했던 프레젠테이션.

연사는 보통 그 분야의 전문가이기 마련. 해당 주제가 정해지면 자료 모으고 연설문을 준비해야 한다. 보통 한 번 연사 될 때마다 모으는 자료가 족히 책 한 권 분량은 되는 듯하다. 통대 2년 다니다 보면 정보, 자료 찾기 검색엔 어느 정도 도가 튼다.




***




일본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의 팬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한 야구 만화.  내용 마지막에  고등학교 야구 전설이 된 주인공은 프로 입단을 포기한다.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  평생 동안 순수한 마음으로 재밌게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통번역 대학원 다니면서 어느 때보다 자주 곱씹었던 말이다.

취미와 프로의 세계는 엄연히 달랐다.

통번역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그렇게 사랑했던 일로 매일같이 당하던(?) 까임.  천만 원의 수고쯤 쏟아낸 거 같은데 돌아오는 건 늘 냉철한 크리틱뿐. 열심히 뛰어가는 내 위로 날아가는 동기들을 보며 느끼는 좌절감. 뭐라도 될 줄 알고 들어왔는데 뭣도 아니었구나 하는 열패감.

아직 나도 다 살아본 건 아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한 선택이었다, 아니다 라는 말은 성급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들 하던데.


그렇다면 내 몸이나 마음,

그 어딘가도 분명 튼튼해졌겠지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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