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당신,
떠나라!
원없이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아프리카.
대학원 졸업 후 내 첫 직장은 아프리카 알제리였다.
불어를 쓰는 곳은 생각보다 많다. 특히 학창시절에 배웠던 북아프리카 3국, 모로코/알제리/튀니지는 한창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불어권 국가들. 지금도 많은 한국 기업들이 그곳의 SOC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사하라 사막 모래 바람 너머
푸른 돔 모양의 궁전이
신기루처럼 나타날 것만 같았던 아프리카.
어릴 때 부터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조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해 일하고 싶었던 젊은 날의 혈기가 거기에 더해져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만 싶었다.
생면부지의 그곳에서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개도국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허세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늘 번번이 부딪히던 가족의 반대. 이러다 영원히 갈 기회를 놓쳐 버릴 것만 같았던 어느 해 2월. 가족 몰래 면접을 치르고 출국 2주 전 통보했다. 어차피 맞을 매 조금이라도 늦게, 덜 맞고 싶었기에.
그렇게 떠났다.
알제리 수도 지하철 공사 현장 감리를 맡은
한국 기업 통역사로서.
총 비행 스물 두 시간, 다섯 번째 기내식이 물릴 무렵 드디어 도착한 알제리 공항. 어스름한 해질녘 노을로 물든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에 떨구어져 주위를 둘러 본 순간, 이내 후회했다.
내 발등 내가 찍었구나.
바로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불려나간 발주자/시공사/감리사 대표 회의 통역.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 속에서 적응 시간을 달라는 건 사치였다. 이 회의 저 회의 부르면 달려나갔다. 아침엔 시멘트 시험 현장에, 오후엔 수십 미터 땅굴 속으로.
내가 기대한 아프리카와 실제 알제리는 너무도 달랐다. 알베르 카뮈와 지네딘 지단의 고향, 이자벨 아자니를 떠올리게 하는 알제리 여자들. 고대 누미디아 인과 카르타고 인들의 도시, 로마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그러나 매일 출근하는 현장엔 우리나라 70년대를 닮은 개도국의 현실만 있을 뿐이었다. 뇌물을 밝히는 공무원과 고성이 오가는 회의, 시공사/감리사 간 힘 겨루기.
그런 와중에서도 이탈리아 업체가 운영하던 구내 식당 점심 밥은 최고였다. 또한 진정으로 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알제리 청년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도 멋진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알제리라는 나라의 문화를 처음 맞닥뜨렸던 몇 달간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국민 모두가 단체로 금식하는 라마단
아직도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지던 그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알제리 사람 대부분은 이슬람이다. 해마다 라마단 기간만 되면 그야말로 전 국민이 집단 주술에 걸린 것 처럼 보였다.
해가 하늘에 떠 있는 동안은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거의 한 달이라는 기간을 그렇게 보낸다. 대신 해가 지고난 밤에는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 열린다. 친척, 지인집을 방문하고 잔치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
낮에는 먹지 않고 밤에는 자질 않으니 당연히 일을 할 수가 없다.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 가까이 모든 일의 진척이 멈추다시피 한다.
뿐만 아니다. 알제리 사람 앞에서는 물 한모금 마시기도 미안하다.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사무실에서 간식하나 먹었다간 안 그래도 예민한 그들의 신경을 거슬릴 수 있기에 쥐 죽은 듯 지내곤 했다.
알제리 동료 말에 따르면 라마단은 비단 종교의 예식일뿐 아니라 덥고 건조한 사막기후에서 살아남기 위한 삶의 한 행태라고 했다. 한 달간의 금식을 통해서 더욱 건강해지는 거라고.
문화를 어느 한 잣대로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순 없다. 하지만 국민 대부분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종교적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살짝 숨이 막혔다. “생각의 다름”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