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카페
사라진 프랑스 식민 잔재 대신 아랍문화가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려 있었던 2010년대의 알제리.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과 대학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여성의 인권은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출근 이튿날 처음 갔던 사무실 근처 카페. 전설 속 크리처라도 본 듯 빤히 쳐다보던 알제리 남자들의 그 눈빛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처음엔 당연히 동양인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 시선은 익숙했다. 한국 사람 한 명 없던 프랑스 깡촌 시골마을에서도 늘 그랬다. 버스 탈 때부터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나를 쫓던 시선들. 그냥 내가 예뻐서 그런 거라고 오버스러운 자기 최면을 걸며 기분 좋게 넘기곤 했다.
그랬기에 알제에서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주위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혹은 동료들과 참새 방앗간 드나들던 했던 카페.
갓 구운 따뜻한 크루아상에 롱 블랙 한 잔으로 찌뿌둥하던 아침을 열어주던 그곳. 눈조차 뜨기 힘든 강렬한 태양을 어깨 위로 맞으며 종일 걸어야 했던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만나던 시원한 한 잔의 레모네이드.
그러던 어느 날, 카페 주인이 말했다.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아무래도 혼자 오는 건 위험하다고. 알제에서 여자 혼자 카페에 오는 건 좋아 보이지 않는단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카페에 혼자 오는 게 문제라고?
단지 여자라서?
그렇다. 지구 반대편의 누구는 화성을 가네 마네 하는 21세기에도 알제리는 여전히 공식적인 일부다처제의 나라, 과부가 재혼을 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나라였다.
한 번은 한국 남자분이 알제리 남자 엔지니어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여러 명의 부인을 둘 수 있으니 좋겠다고. 그러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하던 그. 부인은 한 명만으로 충분하단다. 그의 자조적 어투에 우리 모두 빵 터지고 말았다.
카페 주인은 어리둥절하는 내게 나름 친절히 설명을 이어갔다. 카페에 혼자 가는 여자는 스스로 거리의 여자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알고 보니 카페뿐 아니라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항상 남자를 대동하고 다녀야 한단다.
여자는 그저 남자의 재산 중 가장 값나가는 것에 불과했던 그곳. 반면 또 다른 한쪽에선 제 목소리 내던 고위직 고학력의 알제리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알제리의 민주화에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알제리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진정한 아랍의 봄, 여성들에게까지 그 훈풍이 이어지길 기도해 본다.
물 보다 기름이 더 싼 나라
알제리는 더우니까 막연히 각종 열대 과일이 저절로 주렁주렁 열릴 줄 알았다. 물가도 우리나라보다 열 배쯤은 더 낮을 줄 알았다.
크나큰 오산이었다.
가끔 길거리에서 팔던 수박은 엄청 달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수박 말곤 달리 살 만한 과일이 시장에 나오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지붕에 던져놔도 알아서 포도가 열릴 만큼 뜨거운 태양빛을 가졌지만 그 외 농사 재배 기술이 없었던 당시의 알제리.
외국인인 우리가 그나마 장 볼 수 있었던 곳은 모두 프랑스 브랜드의 슈퍼마켓뿐! 그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모두 수입품이었다. 농사기술도 제조 산업도 발달하지 않은 알제리에선 그야말로 모든 식료품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천연가스와 석유가 풍부해도 그 자원을 정제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토털(TOTAL) 같은 프랑스 정유회사들이 값싸게 천연자원을 수입해가서 정제한 후 비싼 가격에 오일을 되파는 식이었다.
따라서 생활 물가는 한국만큼 아니 어떨 땐 한국보다 더 비쌌다는 웃픈 현실.
정말 물 보다 기름이 더 쌀까?
한 번은 제대로 따져봤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대로 알제리에선 물 보다 기름이 더 싼 지.
정말 그랬다. 볼빅, 에비앙과 같은 수입 미네랄워터보다 리터당 단가 기준 기름이 더 쌌다. 물 역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은 전부 수입품이었기에 물보다 기름이 더 저렴했던 것이다.
가끔은 눈도 내리는 알제리
오랜 비행 끝에 피곤한 눈을 비비며 비행기에서 처음 내려다본 알제리. 황톳빛 도시와 함께 하얀 눈이 내린 설산과 눈이 마주쳤다. 떠나오기 전 얼핏 들었지만 정말 아프리카에 눈이 내릴 줄이야.
물론 그때도 십 년 만에 처음 온 눈이라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어리바리한 나를 붙잡고 집 앞에 쌓인 함박눈을 치웠다는 이야기를 마치 전쟁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직원들.
요즘은 주기가 짧아졌는지 2017년에도 그리고 올해에도 뉴스를 통해 눈 덮인 알제리 사막을 접했다. 눈 덮인 사막이라니! 사자와 토끼가 사이좋게 뛰어논다는 천국의 아프리카 버전처럼 들렸다.
눈도 오는 만큼 춥기도 했다. 3월이었는데도 손가락이 시려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고질적인 수족냉증이라 나만 유달리 더 그랬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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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휘발유가 뿜어대는 배기가스, 깨진 차 창문을 대~충 그까이꺼 비닐로 덧대고 달리는 차들, 굴러가긴 할까 싶은 고물차까지 거리로 쏟아지는 통에 알제에서의 교통체증은 흔한 일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익숙해진 그곳에서의 삶.
가끔은 용감하게도 여자 통역사들끼리 외출도 감행했다. 택시가 오히려 위험하다 하여 집 근처 이웃에 사는 청년이 주말마다 우릴 위해 대리운전 알바를 뛰어주곤 했다.
마늘을 듬뿍 쓰는 닭고기 스테이크 맛집을 발견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우릴 보면 늘 "니하오"를 외치는 알제리 꼬마 녀석들에게도 어느새 무감각해졌다.
샴푸 잔뜩 칠하고 샤워하고 있는 와중에서 갑자기 단수가 되기도 하고 어느 주말엔 하루 종일 정전이 되기도 했다.
가끔은 로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에 가서 그 시절 벽화를 손으로 직접 만져 볼 수도 있었다. 첨성대, 석굴암 모두 멀찍이서만 관람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세대에게 날 것 그대로의 로마 유적지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많은 것을 던지고 감행했던 알제리행.
우리에게 익숙한 선진국이나 동남아시아에 비해 그곳에서의 적응은 결코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어떤 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갈까 말까 고민될 때도 가고
할까 말까 고민될 때도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