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에서 오신 이 상무님
살면서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고 안 기간이 오래인 것도 아니며 아직까지 연락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들의 말이나 행동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알제리에서 일하다 만난 이 OO 님이 그렇다.
내가 현장에 온 지 몇 주 뒤 오셨던 걸로 기억한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지만 다부진 체격,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지금은 쉰을 훌쩍 넘기셨을 거다.
이 OO님은 스스로를 용병이라고 소개하셨다. 이 회사 저 회사 몇 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주로 해외 현장만 다니는 본인을 가리켜 용병이라고. 바로 전에는 리비아에서 근무하셨다고 했다.
알제리 옆에 위치한 리비아.
2011년 리비아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장기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크게 일어나 정부군과 시민군 내전으로 번지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고 한다.
뉴스로만 들었다. 아수라장이 된 공항에서 교민들을 서둘러 탈출시키던 그곳에 이 상무님도 계셨다고 한다.
정부군과 시민군의 총격전도 위험했지만 그보다 성난 민심을 빙자한 도둑질과 약탈이 더 무서웠다고 했다. 사무실 내 티브이, 컴퓨터 등 돈 될만한 전자 제품들은 다 뜯어 갔다고.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인 법과 함께 모든 게 무너지던 리비아에서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뿌듯하셨다고 했다.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과 발길질에서 우리나라 국민들만 대사관 비호 아래 무사할 수 있었다고.
여하튼 그렇게 리비아를 나와
알제리로 오신 우리의 용병, 이 상무님.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 상무님과 외근을 나가 현장을 돌아다녔다. 상무님은 영어가 유창한 건 아니었지만 본인 전문 분야다 보니 불어를 몰라도 간단한 영어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때론 나보다도 더 잘 통하곤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턴 통역 없이 현장을 나가곤 했던 이 상무님. 다른 엔지니어들은 통역 없이는 꼼짝하기 싫어했기에 달라 보였다. 하다못해 집 앞 슈퍼에 나갈 때도 수행 비서 데리고 나가듯 통역사에게 휴일에도 함께 외출을 부탁했던 높으신 양반들.
이 상무님은 종종 리비아에서의 경험담을 무용담처럼 들려주곤 하셨다. 사막 한가운데에 현장이 있어 아무리 더워도 찬물 샤워를 할 수 없다고도 했고 매일 밤마다 모래 바람이 지겹도록 불었다고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이불이며 카페트며 온통 붉은 모래가 덮여 있었다고.
마치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화수분 넘치던 그의 이야기에 우리 모두들 쉬는 시간이면 그분 주변으로 자연스레 모이곤 했다.
한 번은 리비아에서 일할 때 만났던 한 신입 사원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는 캐나다에서 십 년 이상 학창 시절을 보낸 친구였다. 통역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영어를 잘했기에 자연스레 통역 업무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통역에 있어 가장 적임자처럼 보였다고 했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던 그 친구.
그는 영어’는’ 잘했다. 다만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회의 때마다 유창한 그의 영어는 듣기 좋은 BGM에 불과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영어는 잘했지만 정작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커뮤니케이션이 불통이었다.
만약 그 친구가 미국에서 일했다면, 캐나다에서 일했다면 훨훨 날아다녔을지도 모른다. 그의 빠다 바른 듯한 발음과 액센트는 또 다른 영어권 사람들에겐 확실히 강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한국인과 리비아인이었다. 아무리 그 친구가 멋지게 설명해도 말을 마치고 나면 순간 정적, 모두들 눈만 끔뻑거리며 그 친구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때마다 해결사처럼 나타나 엉킨 대화의 고리를 푼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우리나라에서 명문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정직한 한국 발음을 가진 그저 평범한 공대생이었다고 한다.
캐나다 살다 온 친구가 쏼라쏼라 말을 마치면 그 친구가 차근차근 몸짓 손짓 섞어 가며 이렇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디스 이즈 오우 노!
투 데인저러스, 유노?
댓 이즈 투 배드, 노노!
중학교 1학년 수준도 안 될 거 같은 몇 마디 단어 나열에 그제야 리비아 사람들은 예스, 예스 대답을 연발하며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통역이란 뭘까 생각해봤다. 내가 하는 말이 과연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말인지 그저 나 좋자고 하는 말인지 혹은 직업 의무감에 그냥 떠드는 말인지.
알제리에서 우리의 내비게이터가 되어주었던 운전기사도 그랬다. 입만 열면 작은 바늘도 큰 몽둥이로 둔갑하는 탓에 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던 그의 말이지만 어느 날인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본인은 더도 말고 딱 영어 스무 단어만 알고 있다면 어떤 대화도 다 가능하리라고 믿는다고.
중요한 건 자신감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한 손은 허리춤에 얹은 채 짝 다리 짚으며 말하던 희끗희끗한 곱슬머리를 가진 그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통역도 마음이 있어야 한다.
특히나 나 스스로가 연사의 말에 공감하지 못할 때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저렇게 멍청한 말을 내가 한 듯이 뱉어야 하다니 차라리 땅 속으로 꺼지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땐 입으로만 통역한다. 탁구공 랠리 하듯 감정 없이 이 사람의 말을 저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옮기고 또 저 사람의 말을 이 사람에게 뱉는다. 당연히 회의의 끝이 좋을 리 없다.
아마 영어 잘하던 그 신입사원보다 평범한 공대생 사원이 리비아 워커들에게 갖는 애정이 조금은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이해시켜주고 싶은 마음,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이 1%라도 조금 더 있지 않았을까.
아는 영어 단어가 스무 개에 불과해도 알아듣고 싶은 마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사실 뭔 말인들 불가능할까.
박연이 제주에 처음 표류했을 때 그의 말 알아듣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조선에서 여생을 마쳤다.
낯선 땅에서 잘 살아보려는 그의 마음과 파란 눈 도깨비같이 생긴 그를 어떻게든 잘 살게 도와주려는 조선인들의 속정 깊은 오지랖에 박연은 후에 하멜을 만날 때 오히려 본국의 말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만의 자유의지 영역이라는 마음.
얼마나 오래 살아야 내 마음은 내 것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