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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효 Jan 27. 2021

깊고 고요하게 비우기의 미학

19세기 이탈리아 팔라초 다니엘레

비어 있음에도 가득 차 있다. 그 유명한 존 케이지의 4분 33초짜리 침묵의 음악을 공간으로 구현한다면 이럴까. 새의 지저귐과 광장의 소음, 수 영장 정수기 모터의 산발적 진동 소리조차 음악이 되는 이곳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풀리아에 자리한 대저택 ‘팔라초 다니엘레(Palazzo Daniele)’다.


다니엘레 가문의 5대 후손이자 현대미술 비영리 재단인 ‘카포 다르테 (Capo d’arte)’를 10년째 운영 중인 프란체스코 페트루치(Francesco Petrucci)의 어릴 적 기억 속 팔라초 다니엘레는 두꺼운 벨벳 커튼과 카펫, 화려한 천장 프레스코화와 보르도 색 벽지, 로코코 스타일의 몰딩과 오브제로 가득한 곳이었다. 추억 속에만 자리하던 저택이 새롭게 숨쉬기 시작한 건 몇 해 전. 2016년 이모가 작고하면서 그에게 저택을 상속했고 프란체스코는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루도비카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을 모던하면서도 유기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에게 루도비카와 로베르토 팔롬바 부부는 빛나는 명성을 떼어놓고서라도 따뜻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 공간의 재배치와 그 용도 변경의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축가였기 때문. “실제로 팔롬바 부부는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규정되지 않은 ‘원석’ 같은 공간을 창조했습니다. 공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지극한 아름다움을 빚어낸 것이지요.” 그리고는 그에게는 거의 ‘치유의 과정’에 가까울 정도로 강도 높은 리모델링과 본질에 집중한 복원의 과정이었노라 고백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861년 지어진 고저택은 현대미술을 논하는 너른 장이자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 소속 아티스트의 레지던스로, 때로는 이탈리아의 한적한 마을 풀리아를 찾는 손님을 맞는 게스트하우스로 재탄생했다.



미니멀리즘과 디테일 사이


158년 역사를 이어온 팔라초 다니엘레는 그간 스타일도 조금씩 바뀌었다. 2세대 외고조 할아버지 시기에 이르러서는 인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기술로 일컬어지는 프레스코화로 보다 장식적이며 낭만주의적인 스타일을 띠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의 프레스코는 천장의 회반죽이 마르기 전 채색하는 방식으로, 물감이 자연스레 벽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건물의 수명만큼이나 오랜 생명력을 자랑한다. 프란체스코는 120여 년 전 그려진 프레스코화처럼 역사를 존중하되 새로운 공간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리모델링을 시작했는데 건물 면적만 약 1000m2, 아치형 층고 높이만 6m에 이르는 꽤 방대한 양이었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지난한 과정이었음에 틀림없다. 저택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방으로 안뜰을 안은 ‘ㅁ’ 자로, 프란체스코가 머무는 동관, 그리고 게스트를 위한 서관으로 나뉜다. 건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단순한 듯 숨은 디테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햇살이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면 빛이 스미는 벽마다 고색과 질감이 온전히 드러나는데 보르도 색 벽지를 일일이 걷어내고 기본 마감에 충실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단조로운 색감으로 정돈한 벽은 화려한 천장 프레스코화와 바닥 타일 장식과 조화를 이뤄 빼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미니멀리즘과 장식미술의 조화는 그저 인테리어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 공간을 수직과 수평으로 분절하기도 하고 유려하게 연결하기도 하면서 시각적 연속성을 준다.


비워야 담을 수 있는 가치


저택의 주인인 프란체스코와 프로젝트를 맡은 팔롬바 부부에게 이 ‘비움의 과정’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남겨두어야 할,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사색의 시간’이기도 했던 것. 하긴 비우기 위해서는 선별의 과정이 필수이리라. 비단 물건뿐 아니다. 비워내면서도 군데군데 지키고 싶은 시간의 흔적들을 그대로 남겨두고자 애썼다. 또 소파와 벽 조명, 샹들리에를 들어낸 자리는 여러 아티스트의 예술 작품과 심플한 이케아 조명, 역사와 세월을 담고 있는 오브제들로 채웠다. 이는 팔라초가 그저 거대한 현대미술 갤러리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프란체스코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기도 했다.


“고색창연한 건물에 자리한 이케아 조명은 ‘와이 낫(Why Not)?’이라는 일종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침대 자체가 하나의 설치 미술이 될 수 있고, 담백하면서 평범하고 대중적인 디자인 조명이 아주 특별해질 수도 있다는. 너무 고상한 체한 걸까요?(웃음)” 따지고 보면 팔라초 다니엘레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로코코 양식과 모더니즘 이 융합하고 알렉산드라 크라카시안, 안드레아 살라, 시몬 데제아 등 주목할 만한 예술가의 작품이 생활 속에 녹아 있어서다.


현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갈리아노 델 카포


법을 공부하고 다섯 대륙을 떠돌며 국제 정치 분야에서 일했던 프란체스코는 10여 년 전 돌연 이탈 리아로 돌아와 이곳에 정착했다. 결코 쉬운 결정일 리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많은 예술가와 조우하며 현대 예술과 새로운 경향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지요. 늘 의문인 동시에 안타까운 지점이 이곳이 어째서 문화적으로 흥미롭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러다 문득 내 세상을 이곳에 들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시기적으로도 잘 맞았고요.”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에너지는 이내 작은 마을에 소요를 일으켰다. 세계적인 중국 아티스트 양 푸둥을 초정해 상하이에서 작업한 그의 비디오 아트를 마을 곳곳에 설치했는가 하면, 베니스 아트 비엔날레를 마친 인도 아티스트 실파 굽타의 ‘My East is your west(나의 동쪽은 당신에게는 서쪽이지요)’라는 설치미술 작품을 팔라초에 설치해 인도 파키스탄 분쟁을 유럽과 아프리카 간 분쟁으로 새롭게 풀어내기도 했다.


“아티스트는 그들의 섬세한 통찰력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래를 다양한 수단과 방식을 통해 전달해요. 카포 다르테가 설립된 지 올해 꼭 10년째라 내년에는 아티스트를 초청해서 마을에 영구적으로 남을 수 있는 설치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순 없다지만 이 마을은 이미 변하고 있는걸요.”


불완전하게 그리하여 영원하도록


예술 혹은 영감에 대한 갈구는 공간은 물론 생활 곳곳에 묻어난다. 저택은 가운데 위치한 중정을 기준으로 정확히 이분되는데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다니엘레 가문이 살아온 공간이자 팔롬바 부부가 리모델링한 서관 입구로 통한다.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면 그가 문고리 하나, 창문의 잠금장치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덧씌우고 바꾸기보다 비우기 위해 버리고 또 간직하는 그만의 삶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대화 내내 눈길을 사로잡던 항아리 손잡이도 마찬가지. 그는 테이블 위에 금이 간 손잡이를 그대로 놓아두고 있었는데 이유 역시 프란체스코다웠다.


“아주 매끄럽고 완벽한 것은 매력이 없어요. 깨지고 금이 간 것들은 역사를 담고 있잖아요. 그게 시간이고 사연이겠지요. 19세기 말 시작되었으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프레스코화를 보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금이 간 벽에 스미는 늦은 저녁의 석양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처럼요.” 어쩌면 비우기란 찰나에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담기 위한 방법일지 모른다. 오래된 흙벽, 닳고 닳은 모서리, 세월 속에 적당히 바랜 색에서만 비롯하는 ‘무엇’이야말로 프란체스코 그리고 팔라초 다니엘레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테다.


까사 리빙 2019년 1월 호, 글 한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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