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오후에는 언제나 계절을 잊은 비가 내린다. 이 비가 봄비던가 여름비던가. 아, 가을비였지. 이번 봄에도 같은 비가 내렸던 것 같은데. 눈에 보이는 것도 촉감도 소리도 냄새도 같다. 비의 무게, 먹구름의 기운, 자장가가 같은 빗소리,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영화 한 편을 다 보기도 전에 깜빡 잠에 들어 나는 계절을 잊는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는 사람을 잊은 비가 내린다. 비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땅으로 치열하게 곤두박질을 친다. 빗소리에 깨어나 요란한 소리를 듣다, 한밤중이라는 안도를 느끼며 다시 눈을 감는다. 그만 아직 바깥에 있을 누군가를 잊는다. 감았던 눈을 뜨고 창가에 가 문을 열면 씌어주는 우산이 없어 억수같이 비가 내리나 싶다. 아무리 해봐도 비에게 도저히 우산을 씌어줄 수 없어 우산 손잡이를 하늘로 향하게 던져 놓은 게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