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도시 매거진 vol.03_군산 (5)
2016년, 매력도시 연구소가 군산을 찾아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을 꼽으라면 단연 <앙팡 테리블>이었습니다. 활기를 잃어버린 군산의 옛 중심지에 '악동'이라는 의미의 상호를 내건 술집이 있었습니다. 이곳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독특한 공간 때문입니다. 붉은색으로 사방을 칠한 상가 건물 계단을 올라가면, 어둡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타납니다. 아기 천사가 앉아 있는 샹들리에가 천장에 걸려있고 노란빛과 푸른빛 조명이 공간을 비춥니다. 바닥까지 흘러내린 촛농, 자개장을 뜯어 만든 가구와 부서진 기타를 올린 테이블에 사람들이 두세 명씩 모여 모여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 예술과 유머를 뒤섞어 놓은 몽환적인 공간입니다.
많은 가게들이 셔터를 내린 개복동 뒷골목 한편에 이런 고스 goth풍 디스토피아가 숨어 있다니요. 처음 보면 기괴한 모티브를 마구잡이로 버무려 놓은 것 같지만, 천천히 공간을 관찰해보면 만든 사람의 독창적인 손길이 느껴집니다. 첫인상은 기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한 느낌으로 변하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대체 어떤 악동이 이런 매력 공간을 펼쳐놨을까? 우리는 이 개성 만점 공간을 운영하는 미지의 인물을 궁금해하며, 칵테일과 몰트 위스키를 한잔씩 마시고 돌아섰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우리는 앙팡 테리블을 꾸미고 운영한 주인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개복동에 만든 또 다른 매력 공간, 카페 <나는 섬>에서 말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쉬운 뉴스부터 전해드립니다. 군산의 디스토피아 <앙팡 테리블>은 이제 전설로만 남았습니다. 최근에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앙팡 테리블의 주인은 금속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가죽 잠바와 팔뚝에 문신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권능 대표의 첫인상은 깔끔하고 지적인 느낌이었습니다.
"... 어렸을 때였죠. 제 작업을 했었어요" 앙팡 테리블을 만들던 당시에 대해 묻자 한 박자 쉼표를 찍은 다음 느릿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군산에 자리 잡고 작업을 하던 아티스트였습니다. 어떤 작업을 했나요?
"영상 작품이 있어요. 침대에 불을 붙여서 바다에 던져 넣고 몇 시간 동안 불타는 침대가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을 찍었죠.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꺼내와서 전시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직접 바다로 뛰어들었죠. 한겨울이었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저러다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또 살짝 쉼표를 찍고 별일 아니라는 듯 툭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때는?"
장발을 휘날리고 다니며 침대에 불을 지르던 악동 아티스트가 바로 젊은 조권능이었습니가. 아티스트가 되기 직전, 서울로 올라와 미술계 잡지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홍대의 예술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들이 함께 놀고 일하는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고 합니다. 그가 어울렸던 괴짜 예술가 그룹은 홍대를 중심으로 젊고, 거칠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곁에서 그들을 지켜본 조권능은 같은 일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홍대 크루 crew들이 동네를 거점으로 문화를 만드는 현상을 지방의 도시에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단순히 예술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영향력이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술 활동이) 사회 변화로 이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 같고, 예술가들이 직접 나서서 그 일을 하는 것, 마을의 일을 하는 것이 멋져 보였죠. 그런데 굳이 그걸 다른데서 하지 말고, 고향인 군산에서 하자. 이렇게 시작한 거죠."
그는 군산 무브먼트의 거점으로 개복동을 선택했습니다. 한때 개복동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오가던 도시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수송동, 나운동 같은 신도시가 생기고 사람과 가게들이 그곳으로 옮겨 가면서 구도심은 활기를 잃었습니다. 전통적 중심지의 쇠퇴현상. 다운타운 슬럼 downtown slum이 됐습니다.
이런 험지로 들어가, 그는 카페와 술집을 열고 예술 활동의 중심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예술가 기질을 듬뿍 담아서 독창적 스타일로 공간을 꾸몄습니다. 영상을 상영하고, 지역의 책을 소개하고, 가수들을 초청해서 공연을 열었습니다. 문화가 있어야 지역이 산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그는 자신의 카페와 술집이 문화의 출발점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지역 예술가가 모이는 아지트 말입니다.
1800년대, 프랑스 파리.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허구한 날 동네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동료 화가와 예술가들을 만났습니다. 물체 대신 빛을 그려보자는 기묘한 아이디어가 여기서 발전되고 퍼져 나갔습니다. 카페 <게르부아 Guerbois>에서 말입니다. 소설가 보르헤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카페 <토르토니>를 지켰고,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은 공상가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조권능 대표가 앙팡 테리블과 나는 섬을 만들며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는 아마도 이런 지역 예술가들의 아지트였을 겁니다.
게르부아든, 플로리안이든, 이런 곳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업 공간입니다. 누군가 개인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공간을 만들고, 손님이 상품을 팔아줘야 유지가 되는 곳입니다. 마네도 카페에서 돈 내고 커피를 마시면서 인상주의를 논했습니다. 행정이 주도해서 공간을 만들고 예술가를 모으는 문화 공간이 아니라, 멋진 공간에서 술과 커피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의 예술가와 주민이 스쳐가는 아지트. 조권능 대표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페 <나는 섬>도 그런 공간입니다.
페인트를 아무렇게나 흩뿌린 벽, 금속 셔터를 비추는 독특한 영상. 책, 커피, 디자인, 음악.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매력적인 신호를 내보내고, 이 신호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홍대의 크루들과 밤새 어울리고,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 내보낼 수 있는 신호입니다.
예술을 중심으로 지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예술 활동만으로는 부족하다. 카페, 술집,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독특한 상업 공간이 결합되어야 한다. 이게 아티스트 조권능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공간이 동네에 필요하니, 누군가 좀 해라. 내가 공간을 꾸며줄게.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다녔지만 아무도 안 했어요. 결국 제가 그런 공간을 만들었어요. 카페 나는 섬을 만들자마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누군가 나 대신 운영을 해주면 좋겠는데... 아무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제가 직접 운영을 한 거죠."
그의 손으로 만들어 내보낸 신호에 즉각 반응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교류하고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나는 섬과 앙팡 테리블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군산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간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고, 생각보다 금방 진행이 됐어요. 그런데 운영 과정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상처 주는 일도 생기고, 서로 지치고... 저 혼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다가 앙팡 테리블을 접어야겠다, 결정했죠. 재미는 있었지만, 결국."
공간을 만드는 것 까지는 성공했지만, 동네 사람들의 모임, 즉 지역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그는 소도시에 커뮤니티를 만드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단맛 쓴맛을 체험해 본 사람이 되었습니다. 침대를 불태우던 아티스트가 말입니다.
"저는 사업을 일찍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소리만 들은 것은 아니었죠. 가수들을 섭외해서 공연하는 거, 너 돈 벌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말들이 나왔고, 저도 갈등을 했던 것 같아요."
이게 맞는 길일까? 동네에 문화를 불어넣는 방법으로?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방식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상업 공간과 마을의 문화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균형 있게만 한다면 더 큰 상승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격려를 보내는 사람들이 군산에 자리를 잡았고, 도시 연구자들과 해외의 성공 사례를 공부하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방 소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접근 방식을 거칠게 요약하면 상업과 커뮤니티,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상업 시설이 들어서고 장사가 잘 되면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카페, 술집, 편집숍이 들어서면서 동네의 매력이 올라갑니다. 하지만 기존 주민과 상업 시설의 운영자들의 교감과 협력이 없다면 이런 매력은 취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순식간에 대도시의 번잡함을 닮아가고, 매력의 불꽃은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집니다. 주민들이 떠나면서 지역의 독특한 분위기가 지워집니다.
쇠락한 동네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상업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적어도 첫 신호탄은 쏴 올려야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볼 테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지역을 사랑하고 돌보게 하려면, 커뮤니티의 유대감이 필요합니다. 함께 어울리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서로의 존재를 고마워해야 지속성을 가집니다.
좋은 신호를 내보내는 상업 공간, 지속성을 확보하는 커뮤니티. 둘 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다면 다 매력 소도시가 됐겠죠.
좋은 신호를 내보내는 상업 공간,
지속성을 확보하는 커뮤니티
개복동의 실험 후 약 10년이 흐른 지금, 조권능 대표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동내 재래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을 이끌고 있습니다.
"내 공간이라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을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중요한 시험대죠."
이번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드는 측면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쉽지 않다는 것, 이미 경험했습니다. 단순히 공간을 만들기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이번에는 공동체가 힘을 합해 운영해 나가는 모델을 만들 예정입니다. 조권능 대표는 <주식회사 지방地方>을 세우고 '지역 운영 Area Management'라고 불리는 마을의 통합적 관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든든한 우군들이, 크루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안락한 침대를 다시 불태워 버리고, 또 다른 바다로 뛰어든 조권능 대표. 군산 지역과 군산 사람의 특징을 잘 알고 있고, 마을 문화의 중요성을 이해하며, 상업과 커뮤니티의 균형이 성공의 핵심임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이번에는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까요. 조만간 군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을 다시 만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매력도시연구소]
매력도시 매거진 vol.03_군산
1편: 군산, 인터내셔널을 준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