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와 인생이 닮았다?
흔히들 골프가 인생을 구석구석 닮았다고 합니다. 일단 각양각색의 길이와 폭, 지형 등으로 다양한 난이도를 선보이는 홀들, 그 홀들이 하나 둘 길게 줄 지어선 골프코스가 우리네 삶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동일한 코스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궤도를 그려가며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칩니다. 이 코스 위에서는 이전 홀의 성공이 다음 홀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이전 홀의 실패가 꼭 다음 홀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도전과 그에 따른 결과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부를만합니다.
또한 본인의 사망이 아니고서는 꼭 참석해야 한다는 골프 라운딩은, 누구나 매일 공평하게 부여받는 하루하루와도 같습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견딜만한 수준이라면 참가자는 여지없이 티박스에 서야 합니다. 컨디션이 엉망이고 머릿속이 복잡해도 어김없이 어드레스를 해야 하고, 금세 미스샷을 날리고 말 거라는 꺼림칙하지만 꽤 정확한 불안이 엄습해와도 어쨌든 샷을 날려야 합니다. 이것은 골프 외에 다른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마라토너는 달려야 하고, 복서는 주먹을 날려야 하고, 양궁선수는 활을 과녁으로 보내야 합니다. 골퍼에게 골프가 인생의 축약이듯, 마라토너에게는 마라톤이, 복서에게는 복싱이, 양궁선수에게는 양궁이 이런저런 의미에서 인생의 축소판일 겁니다.
도구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내 맨몸으로 맨 정신으로 도전에 맞서서 그 도전의 끝을 알리는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거쳐야만 하는 경기의 매 순간순간, 그 자체가 인생의 모습이 아닌 때가 단 한순간이라도 있을까요. 매분 매초 만나는 수많은 번민과 그 안에서 택하는 무수한 선택은 그안에 우주가 담겼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모래 한알처럼 내 존재 전체 우리의 인생 전부가 들어있는 건 아닐까요. 사람들이 골프가 인생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 혹은 그 외 많은 스포츠에서 인생의 은유를 찾는 것은, 이렇듯 경기에서 마주치는 많은 지점들이 인생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골프에서 인생의 은유가 진하게 느끼지는 때는, 공 앞에 홀로 서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언젠가 한번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독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커다란 무대 위 어떤 악기나 연주자의 도움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검은 피아노 한 대, 그 앞에 그가 홀로 앉아 있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수백 명의 기대와 의심, 침묵의 무게를 비집고 그가 비로소 열 손가락을 움직여 음을 하나씩 만들어 갈 때, 그 젊음이 느끼고 있을 외로움이 저를 압도합니다. 이윽고 그가 무수한 음의 가능성 속에서 선택받은 음들로 이야기를 지어갑니다. 지상의 재료로 천상의 것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 현장에 목격자로 앉아 조금전까지 그를 동정하고 있던 저는, 그가 자기 터치의, 멜로디의, 그 시공간의 오롯한 주인이라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샘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필드에서나 연습장에서 공을 앞에 두고 설 때, 그리고 골프 클럽을 움직여 샷을 날리고 비로소 그 공이 어디에 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몇 초 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는 무수한 시간이 지나가고 무수한 장소가 넘어가고 무수한 사람들이 스쳐갑니다. 내가 서 있는 그 영원 같은 찰나. 그 찰나와 샷의 주인은 오롯이 나입니다. 그리고 그 샷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기꺼이 인정하고 싶든 도무지 인정할 수 없든, 그 샷이 공을 옮겨 보낸 그 자리에서 나는 또다시 새로운 샷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사진 언덕이든, 나무 밑이든, 모래밭이든, 물가든, 심지어 발을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조차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땅일지라도, 그 이전의 샷이 이끄는 곳에서 나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만든 시작이 끝이 되고 그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행위의 연쇄와 반복, 그리고 그것의 명징함. 이것이야말로 제가 골프를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