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몰랐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
포터와 만나는 시간은 아침 7시. 기상 시간은 원치 않는 5시 30분. 옆 방의 자매에게 잠을 깨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5시 50분쯤 인도로 가기 위해 출발할 예정이라고 했다. "똑똑똑.." 정확한 시간에 나를 깨우려 자매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어울림을 깨웠다. 어울림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여행 전 잠자리에 어떻게 적응을 할지 염려를 했었지만 어울림은 예상보다 편하게 잘 잔다. 혼자 일찍 일어날 때면 씻고 책을 보면서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나를 흡족하게 했다.
포터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고쿨'이다.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숨이 차분해질 때쯤 미심쩍은 마음에 택시 요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역시 문제가 생겼다. 한두 번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은 기분을 망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나는 분명 1500루피로 예약을 했었다. 그런데 운전수는 2500루피를 달라고 한다. 이러한 경우에 나는 매우 단호하며 협상의 여지를 두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그를 원망할 수는 없다. 아무튼 나는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콜을 받고 왔는지 물었다. 당황하는 눈빛을 보이며 말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상한 영어를 지껄여 알아듣지 못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1500루피로는 갈 수 없다며 1800루피까지 흥정을 한다. 나는 이미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구사했다. "머니 이즈 노 프러블럼"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고쿨이 놀라며 입이 반쯤 벌어진다. '이런 쓰... 버스를 타자고?' 고쿨의 눈에서 적외선 모스 부호가 깜박거린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다른 택시를 소개해 주며 요금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마무리를 쿨하게 하기 위해 운전수에게 100루피를 주었다. 이동한 거리를 생각해서 선심을 쓰듯 건넸다. 내가 단지 돈 때문이 아니라 처음의 계약과 달라진 이유를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싶었다. 아. 허세.
어울림은 히말라야의 건친 계곡과 원시림에 매료되어 아직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잘 걷는다. 나도 택시요금 문제의 불쾌함은 계곡 밑으로 굴려 버렸다. 고쿨과도 짧은 단어를 주고받으며 서로 친해고 있었다. 처음 만나서 택시요금 문제로 보인 까칠하고 완강한 나의 태도가 고쿨에게 트래킹 일정 내내 불편함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첫인상은 중요하니까. 뭐. 내 첫인상 어떻게 느껴졌든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첫인상이 좋아 보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으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모든 대상의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과학적 실험의 결과로도 사람의 첫인상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견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또 오래 지속된다고 보고된다. 물론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나는 첫인상의 중요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나에 대한 첫인상이 대체로 좋지 않게 결정된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론들은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가 그냥 심심풀이 논쟁으로 쓰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첫인상의 중요성은 남녀의 연애에 있어서 확실한 형태로 증거 된다. 연애와 만남의 지속은 이미 그때 결정이 난다고 해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렇게 첫 만남이 주는 인상은 첫사랑처럼 강렬해서 이후의 관점을 제어하는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판단의 과정이 시작되면 우리의 뇌는 효율을 바탕으로 진화된 만큼 가장 간단하고 빠른 경로를 통해 결과에 이르게 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재혼한 아버지를 둔 자식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아버지가 재혼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일 거야.'라고 하는가 하면, 그 사람이 이혼을 하면 '피는 못 속인다더니 저것도 유전이야.'라고 가장 효율적인 논리를 전개한다. 첫인상은 건물의 골조를 만드는 것과 같아서 부수고 다시 짓기 보다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리모델링을 통해 겉모습만 바꾸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 그 틀은 잘 바뀌지 않는다. 말했지만 우리의 뇌도 시간과 비용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가 뭐래도 효율적인 동물이니까.
그러나 서로가 진지함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상대를 규정할 수 있는 정보와 근거들이 다양해 지기 마련이며 따라서 상대에 대한 처음의 견해를 바꾸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알고 보니"이렇더라. 즉 이전에는 몰랐었다는 말이다. 처음의 판단이 경솔했거나 현명하지 못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너무 친절하고 좋은 사람일 수도, 알고 보니 인성 쓰레기에 사기꾼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알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한다.
다양한 정보보다는 유일한 정보가 더 많은 믿음을 구축한다. '처음'과 '유일'의 강력함은 대상의 규정에 무한한 신뢰와 신념을 제공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 무엇인가에 근거해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효율성에 집착한 인간의 성급함으로 인해 첫인상의 유일한 정보는 우리의 판단과 견해를 너무도 비합리적으로 이끌어 버린다.
나는 어울림을 부모와 자식, 아빠와 아들이라는 관계 안에서, 그 생활 안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 어울림과 내가 친구가 될 수는 있어도 친구는 아닌 것처럼. 나는 그만큼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알 수 있는 것만 알게 된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의 영역과 교차되는 어울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울림은 나에게, 내가 알아야 하는 것, 알아도 되는 것 만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어떠한 상대에 대해 모두 알려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모두 알고 있는것은 더 이상하다.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 어울림도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사실 알고 보면 사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고, 가끔은 살만하며, 더 가끔은 즐겁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말할지라도. "알고 보니 모르고 한 소리였네."
늦지 않게 숙소에 도착해서 땀으로 젖은 몸을 차가운 물로 씻었다.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무료가 아니었다. 택시비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굳이 돈을 주며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에서는 돈을 문제 삼고 있었다. 경비를 아껴야 하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이 그때인지는 모르겠다.
어울림은 피자를 저녁밥으로 먹었다. 나는 초우면과 럼주를 한잔 했다. 밤 12시를 넘기자 어울림이 구토 증세를 보이며 괴로워한다. 척추뼈를 압박하고 배와 손을 마사지했다. 괜한 고생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어울림이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고 한 것은 어울림이었지만 그래도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한두 시간 정도 지나 잠이 들었다. 방 안의 습도는 충분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느꼈는지 아니면 첫날의 숙면을 돕기 위함인지 밤새 거센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