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퍼뜩! 눈을 떴다. 차라리 잠을 자지 말았어야 했다. 모두 망쳐버렸다는 생각과 짧지만 꿀잠을 잤다는 생각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오늘 일정... 2400루피... "어울림!" 벌떡 일어나 앉으며 다급하게 어울림을 깨웠다. 어울림이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버스 놓쳤다" 내가 심각하게 말했다. "어떡해?" 어울림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일단 푹 자자" 어울림과 나는 다시 누웠다. 2400루피가 아깝다는 생각은 바뀐 일정에 마음을 기울이자 빠르게 멀어졌다. 그리고 잠이 가까워지며 걱정들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9시. 잠에서 깨어났다.
비가 내리고 있다. 창을 열었다. 빗소리와 함께 바깥 냄새가 녹아있는 무겁고 눅눅한 공기가 스며들어왔다. 다시 창을 닫았다. 빗소리와 습기는 낭만적으로 옅어진 어둠과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이런 날은 배고픔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침낭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좋다. 나른하지 않은 묵직함이 몸을 당기고, 체온으로 데워진 침낭의 온기는 부드럽게 피부를 쓸어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액체 안에 담겨진것 같았다. 다리 사이에 침낭을 끼우고 몸을 웅크렸다. 기억 날리가 없는 자궁 안에서의 기분이 지금 같았을거라고 확신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밤사이 쏟아진 폭우는 나를 자궁 밖으로 쓸어내 현실의 길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면 마날리-레 구간의 도로가 낙석이나 산사태로 자주 막혀버린다. 길 위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는 물론 중간 경유지에서 복구 소식을 기다리며 하루 이틀을 보내야 할 때도 있다.
버스 예약을 대행 해준 식당을 찾았다.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혹시 우리 때문에 버스의 출발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황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출발하지 못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새벽까지 현지인 직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도로 사정을 알고 난 뒤 일정을 결정을 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레를 가지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심란해하는 나를 보고 그들은 출발한 버스와 연락을 시도했다. 한 시간 후 연락이 왔다. 버스는 지금 다르차에 도착해 있다고 했다. 위치로 볼 때 버스는 아무 문제없이 운행된 것 같았다. 날씨를 더 살피고 오후에 결정을 하기로 했다. 짧은 시간 빗속을 걸었다.
숙소로 돌아와 퇴실을 하고 짐을 옆 방에 옮겨 놓았다. 숙소 1층에는 식당 겸 카페로 사용되는 공간이 있다. 벽걸이 텔레비전과 컴퓨터도 있지만 고행을 하고 싶지 않다면 컴퓨터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유익하다. 어울림은 도마뱀을 발견하고는 귀엽다며 쫓아다니고 있었다. "아빠!" 어울림이 높아진 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울림은 엄지와 검지로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도마뱀을 찾기 시작했다. 끈질긴 추적 끝에 도마뱀을 손안에 넣은 어울림은 귀엽다며 집에 데려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도마뱀은 자신의 짧아진 꼬리를 다시 잘라 버리고 떠났다. 처음보다 더 굵은 도마뱀의 꼬리가 어울림의 손가락 끝에서 방향을 잃고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꼬리를 생각했다. 잘린 꼬리는 그 도마뱀의 꼬리 일까. 아니면 그저 잘린 꼬리일 뿐인가. 개체로 성장한 독립적 대상과 달리 꼬리는 분리된 신체의 부분으로 있다. 장미의 줄기를 잘라 화분에 심으면 줄기는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장미가 같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 이 장미는 저 '장미의 것'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꼬리가 있다'라고 도마뱀이 말했다면 잘려나간 꼬리를 보고 저것은 '내 꼬리다'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즉 도마뱀은 꼬리를 소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나에게 꼬리가 있다'는 말은 단지 꼬리라고 지시하는 신체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인가.
우리가 유일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도마뱀에게 '있었던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로의 회상과 함께 고개를 돌려 기억의 너머로 시선을 던질 때라야 더듬거리며 이러한 것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밀린 일기를 정리하는 동안 햇볕이 따갑게 내려 쬐기 시작했다. 태양은 자신의 할당량을 채우듯 하루 평균 일조량을 짧은 시간에 쏟아 냈다. 성급한 태양이 자리를 떠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때가 아닌 것을 뒤늦게 깨닫고 부랴부랴 물러난 것인지, 빛과 파란 하늘이 금방 지워졌고 구름들이 점점 짙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우는 한참 동안 쏟아졌다. 길 곳곳이 물로 쓸려 내려갔다. 빗줄기에 레를 향하던 마음과 안면을 지탱하던 근육들이 축축하게 탄력을 잃고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비옷을 빌려 점심을 먹으러 갔다. 메뉴에 매운탕이 있었다. 호기심은 욕구다. 이곳의 매운탕은 어떤지 궁금했다. 한 시간 만에 요리가 나왔다. 어울림이 맛있게 잘 먹었다. 빗줄기도 약해져 있었다. 얼굴의 근육도 어느 정도 탄력을 되찾았다. 다시 한번 레로 향하는 버스에 연락을 부탁했다. 그동안 도로의 상태를 알고 싶었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너윈에게 전화를 했다. 레에서 뉴델리로 가는 항공권 예약을 위해서였다. 마음은 이미 레를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식당 주인은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여러 상황들이 엉켜가며 결정을 못하고 주저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욕망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후회보다는 아쉬움이 더 오래가는 법이며 오래된 아쉬움일수록 '만약'이라는 가정의 화법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나는 미래에 대한 '만약에'는 착각과도 손을 잡지만 과거로부터 온 '만약에'와 '그랬었다면'이라고 말하는, 그 무의미한 생각들에 대해서는 영원히 화해 할 수가 없다. 과거는, 과거라는 것은 지나간 사실들이 나열된 골동품 상점의 진열대와 같아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힘을 간직 하고있다. 그러나 욕망의 언저리에서 맴돌며 살아 온 자들은 달콤하지만 늘 허기를 느끼는 아쉬움을 먹고 산다.
아쉬움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채색된 지나간 사실들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기쁨을 주거나 또는 우울한 상념의 시간을 사랑해서,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하고 싶을 때면 우리를 시간으로 이끌기 보다는, 흔들리는 촛불이나 주술용 방울과 부채 처럼 시간을 우리의 주위에 옮겨 놓는다. 그리고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무대를 선사한다.
방울은 딸랑거리며 아름답고 우아하게 각색된 시간을 불러들인다. 무대의 완벽한 재현과 동시에 펼쳐진 붉은 부채는 묵은 공기를 현재의 신선함으로 흔들어 깨워 흘려보낸다. 그러나 나는 무대로부터 밀려나 관객으로서 자신의 지나간 사실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객석에서는 무대의 모든 요소가, 흐름을 깨는 실수들 조차 계획된 것처럼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잔인하고 아픈 감정을 담은 붉고 격렬한 조명과 푸른빛 뒤의 음산한 그림자도 무대 예술의 미학적 산물이듯,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 역시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그것은 어떤 아름다움보다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일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 빈약한 장치의 무대 위에 지나간 사실로서 등장했는데, 이후 모든 장치는 제거되었다. 이 후 무대는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꾸며졌지만 무대와 가장 멀리 떨어진 값싼 객석에서 바라 볼 수밖에 없다. 객석에서 드러나는 감정들은 유치하지만 체온보다는 따뜻해서, 성급한 사람들은 1막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만족한 표정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추억은 제거된 무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아쉬움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무대의 배경과 배역의 성격, 나아가 주제까지도 바꿔가며 주관적인 연출가의 자세를 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쉬움 때문에 각색되었거나 섬망처럼 혼란스러운 추억의 무대보다는 후회의 쪽지를 받을 지라도, 지나간 사실이 원형의 아름다움으로 내게 남기를 바랐다. 그것은 진열대 위에서 방울이나 부채의 도움 없이도 언제나 작은 불빛 하나만으로도, 아니면 불빛을 담은 어울림의 눈동자나 노을처럼 물든 뺨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거되지 않은 오래 된 무대에 가장 가까운 좌석을 향해 시간속으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나는 어울림과의 시간에 아쉬움이 끼어들지 않도록 한 번 더 2400루피를 지불했다. 원형으로 남을 아름다운 추억의 가능성을 향해서...
저녁이 되자 구름이 엷어지며 어둠이 찾아들었다. 별들이 듬성하게 보였다. 9시 30분에 인터넷 카페에 갔다. 갖고 있던 만 엔을 루피로 환전했다. 11시 30분에 잉글리시 베이커리로 이동했다. 두 시간 후 미니 버스가 올 것이다. 짜이와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했다. 늦은 저녁이다. 어울림은 피곤해서 인지 먹지를 못하고 얼마 후 식탁에 엎드렸다. 어울림이 지친 모습으로 잠이 들었다. 미안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하나의 지정된 날짜를 과거로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