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해발 3500m.
하늘엔 별들이 각자의 자리에 출근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검푸른 광장은 빼곡하게 들어 차는 별들로 북적였다. 완전한 밤이 되기 전 하늘은 위태롭게 아름다웠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별 무리는 돌멩이 하나를 힘껏 던지면 우수수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이글 게스트하우스'로 왔다. 전에 왔었던 곳을 선택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다. 1층. 400루피. 지하와 다름없는 구조의 방은 빛이 들지 않는 눅눅함이 냉기를 붙잡아 놓고 있었다. '인정머리 없는 것들' 싸늘한 침대 시트와 접촉하자 실망은 억제되지 않았다. 장거리 버스 이동과 고산증의 여파는 피부를 뚫고 항체를 갖지 않은 혈액에 자유롭게 스며들었다. 라면을 끓여 먹었다. 세포마다 피곤함을 외쳐대는 통에 어느 한 곳 돌볼 틈 없이 기분 나쁜 수면의 감옥에 수감되어 버렸다.
"아빠..."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울림이 배탈이 났다. 고산증세와 함께 균형이 깨진 소화 기관은 급하게 먹은 라면의 무리한 요구에 분노한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지사제를 먹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려 했다. 커다란 원통에 불을 피워 데운 물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그마저도 얼마 나오지 않았고 수도꼭지에서는 전기까지 찌릿거리며 피부를 잡아당겼다. 할 수 없이 밖에 있는 공용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어울림은 구토를 계속 했다. 빈 속에 게워낸 것은 소화액뿐이었다. 수척해진 어울림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시간을 챙겨 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원더랜드'에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식당겸 카페였다.
일 년 전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는 한국의 비구니 스님을 만났었다. 원더랜드에서 몇 차례 만나며 짧지만 깊은 생각들을 주고받았다. 스님 생각을 하며 원더랜드로 향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예감에 생겨났다. 멋진 우연은 필연처럼 기억된다. 그리고 영화 같은 일들은 누구에게나 평범함을 가장해 일어난다. 스님을 만난것이다. 반가움은 놀라움과 섞여 내가 예지력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하게 했다. 나는 진지하게 착각의 늪으로 발을 빠뜨렸다.
그러나 놀라움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그 이상하고 기복신앙적인 긍정의 힘이 아니라, 가장 가능성이 많은 시간과, 높은 확률의 장소에 자신의 작은 의지를 배달 함으로써, 낮은 우연의 가능성을 성사시켜 희박한 행운의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스님은 힘겨워 보이는 어울림에게 하루만 지나면 좋아질 거라며 다독였다. 몸이 갖는 피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원더랜드 사장과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울림을 소개했다. 듬직하고 부드러운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좋은 사람이다. 숙소로 돌아와 2층으로 방을 바꾸었다. 1년 전 묵었던 방이었다. 햇살이 쾌적하게 방안을 쓸어 내고 있었다. 어울림에게 레의 풍경의 보여주고 싶었다. 잦은 설사로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이곳을 실신해서 도착한 척박한 땅의 이미지로만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택시를 두 시간 빌려 높은 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700루피. 산티스투파를 비롯해 두 곳을 더 방문했다. 어울림은 막힘없이 펼쳐진 지구의 어느 높은 곳을, 그곳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그의 피로한 얼굴에서 만족한 표정이 느슨하고 편안한 명상 음악처럼 흘러나왔다. 내게도 뿌듯함이 그의 표정과 결을 맞추었다.
숙소에 돌아와 창가에 앉았다. 양말을 벗고 발을 창틀에 올려놓았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몰아넣으려고 발의 각도를 조정하고 있었다. 길을 내려다보니 스님의 모습이 보였다. 건물 1층의 기념품 가게 청년과 말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청년은 내가 앉아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스님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스님 오셨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급하게 어울림에게 말했다. 그리고 탁자 위의 망고씨와 쓰레기들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종이봉투로 덮어 위장했다. 나는 잘 못 한 것이 없었다. 다만 허둥댔을 뿐이었다.
계단을 밟는 소리에 방문을 열어 스님을 맞이했다. 침대에라도 걸터앉기를 권했지만 스님은 선 채로 어울림이 먹을 약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멀미나 고산증으로 힘들 때 좋다며 호흡과 지압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나중에 에너지 공부하면 좋겠네." 스님이 어울림에게 말했다. 나는 문득 친환경 에너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떠한 연유로 한 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명상도 신체와 정신의 에너지에 대한 공부라 볼 수 있으니까. 스님은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나 견해보다는, 젖은 수건을 햇볕에 바삭 말리면 참 좋겠다는 듯이, 누구라도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하고 생각할 수 있고, 무슨 근거와 이유로 저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따라오지 않는 중립적인 어감으로 말을 했다. 어울림은 스님을 편하게 대했다. 나는 그 모습이 의외여서 놀랍기도 했다. 관계 맺기에 소극적이고 쑥스러움이 많은 그였다. 나는 새로운 경작지를 발견한 농부의 눈길로 흐뭇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원더랜드를 다시 찾았다. 저녁 시간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하다. 음식을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파스타와 카레를 주문했다. 가장 빠르게 조리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나와 어울림에게는 질과 양 보다 속도가 우선한다. 요금을 지불하며 사장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내일 이른 아침 델리로 떠난다고 했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첫 여행을 축하한다며 어울림에게 쿠기와 도넛을 두 개씩 포장해 선물했다. 고마움에 말문이 막혔다. 정리되지 않는 내 표정을 보고 그가 말했다. 아주 작은 선물이라고. 그러나 우리에겐 결코 작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어울림은 오늘이 가장 기억에 남고 기분 좋은 날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원더랜드 사장.
사진들
오른쪽 어깨는 언제나 네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