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5-1

열은 받지도 주지도 말자.

by 아무개




만약에. 혹여라도 그런 일은 전혀 없겠지만, 여러분 중에 동북아시아에 두 명 정도밖에 없고, 그나마 남미나 아프리카 정도에 천만 명중에 한 명정도로 있다는 '글을 보는 자' 또는 글을 '아는 자'라고 불리는 분께서, 이 글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고마움의 예를 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 높은 지혜와 지적 호기심이 잠시라도 이곳에 머물러주시는 것에 대해 서른세 번에 걸쳐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이것은 사리에 밝고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리라.




적교삼거리 서울식당 아지매의 칼 소리를 941마디나 되는 긴 교향곡으로 남겨놓고 두곡에 도착했다. 해는 서쪽을 물들이고, 서쪽 하늘은 내 눈동자를 물들이고, 내 눈동자는 잔디와 사람들의 뒷모습과, 그들이 밟고 있는 흙길과 검은 아스팔트 길을 담았다. 하나의 화폭 안에서 밀레의 저녁 빛과는 다른, 들떠있는 8월의 빛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거친 농부들의 손과 팔꿈치를 쉬게 한 정자의 난간은 황금보다 무거운 빛을 담고 있었다. 아침이나 한 낮, 심지어 한 밤중에도 반드시 지금의 이 빛을 띠고 있어야 있어야 될 것만 같은 늙은 흔적들을 반질반질한 표면 속에서 물들이고 있었다.


발가락 서너 곳이 물집으로 부풀기 시작했고 관절에 이상이 생기며 통증이 별도 포장 없이 배달되었다. 매일 아침 걸음을 시작하면 처음의 한 시간 정도는 걸음이 가볍거나 무겁다. 밤사이 피로를 멀리 추사 선생의 유배지까지 배웅하는 데 성공하면 가벼운 걸음이 시작되지만, 그 신성한 밤을 몸에 쌓인 독소들에게 유린당하고 강탈당하게 되면, 출발 전 부어오른 발을 신발에 구겨 넣으면서부터 몸의 무거움은 가중된다. 졸고 있는 발과 다리를 잠든 머리가 깨울 수 없는 것처럼, 흐릿한 정신을 우울한 육체로는 맑게 하기 어렵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한 상태에서는 기쁨을 주거나 활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다.


몸과 정신이 깨어나는 시간은 따로 있지 않다. 새벽 3시에 눈을 뜨고 숙취도, 근육통도 없는 맑고 가벼운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고요함 속에서 안락과 편안함을 담보로 집중의 상태로 빠져들게 인도하는 호객꾼 일뿐. 이런 안락한 집중은 삶의 정념이 온몸에 피를 타고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향해서 가는, 동물적인 시간의 주인이 되기는 어렵다. 나는 야만적 본능 위에 올라타야 한다. 그리고 이성의 채찍을 들어 올려야 한다. 길들인 육체는 졸지 않는다.


움직임을 통한 열기와 피의 배분이 무력감을 벗기고, 우리 몸에 잠들어있는 세포 안의 정신들이 정념의 힘으로 불을 밝히면, 모든 이성의 시간이 끝내는 정념을 포로로 잡고,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히더라도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비로소 동물의 시간이 사람의 시간으로 변화한다.




태양이 가장 높은 나뭇가지의 어린잎을 쓰다듬을 시간이면 이미 한여름의 폭염 주의보는 경보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안절부절못한다. 배낭의 어깨끈을 조이면서부터 수분은 몸을 식히려 살갗을 적신다. 시간이 지나면 땀이 흐르고 걸음은 모든 제약과 통제에서 벗어나며 일정한 속도와 보폭을 정확히 유지한다. 이 완벽한 정확성은 세슘원자의 초당 진동수 보다도 오차가 적어 표준시계를 대신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내가 세슘 진동의 오차 보다도 일정하게 걷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바라느니 볶은 콩에서 싹이 나거나 삶은 달걀에서 검은 고양이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모두에게 복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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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쳐 버린 발은 맨발로 사랑하는 여자의 뒤를 쫓다가 장미 가시가 박힌 듯 하다.너무 아파 차라리 짜릿한 공포가 불꽃처럼 타오름을 느낀다. 순간 신발 속에 이물질이 들어갔음을 알고 신발을 벗어 털어내기를 반복하지만 신발 속에서는 39.8도의 뜨거운 온도만 쏟아진다. 끝내 양말을 벗어 털어내고 걸어도 가시는 더욱 깊이 박힌다. 화상이다. 생수 보다도 깨끗한 액체가반투명한 피부 안에 맺힌다. 물집.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로 나의 신체를 움직여 열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그 열이 내 발에 화상을 입혔다. 그래도 누구에게 보상을 요구한 적 없으니 자해 공갈은 아니다.






'열내지 마라.' 이것은 스스로 내는 자체 발생 열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열이 발생한다. 집착 때문인데 이것이 강해질수록 열의 온도도 정비례하며 높아진다. 발생 열.


'열 받지 마라' 이 열은 복사열과 같다. 열을 직접 방출하는 대상에게서 전달받아 뜨거워지게 된다. 내게 화(열)를 내는 사람을 상대하면 그 열이 전도되어 자신 역시 빠르게 온도가 오른다. 받은 열.


어찌 보면 열역학 법칙으로 환원될 발가락 물집은 흉터가 남지 않는다. 그러나 물집과 달리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열은 자신의 정서를 해치고 심한 경우 마음에 화상을 입고-보통은 이것을 화병이라 한다.-그 상처는 오래 남아 삶을 괴롭게 한다. 그러니 열을 내지도 말하야하며, 주지도 받지도 말자. 누군가 눈치 없이 주거든 정중하고 단호하게 사양해야 한다. 한 번 받으면 버리는 게 쉽지 않다. 아까운 것도 아닌데. 가장 좋은 것은 상대에게 벽을 치는 것이다. 방화벽.


절뚝이며 걷는다. 바람 때문에 힘들고, 평소 느끼지 못했던 모래알 , 도로의 경사 굴곡 등이 걸음의 모든 것을 방해하는 작용원으로 등장한다. 등장. 등장이라고? 그것들은 이미 있었다. 평소 느끼지 못했던 요인들이 힘들게 한다면 그만큼 예민해졌다는 뜻이다. 예민하다는 것은 이미 한계에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계와 나란히 걷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들이 돌아갔다. 운동기구들만 희미하게 어둠 안으로 물러서고 있다. 옆에 짓고 있는 체육관 건물 앞에는 공사에 필요한 물을 사용하기 위해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가 있다. 물은 항상 나를 기쁘게 한다. 모든 생물은 물에서 생겨났나 보다. 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홀라당 발라당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샤워를 했다. 저만치 도로에서는 자동차와 사람이 드물게 지나간다. 그래도 어두우니까 다 보이지는 않겠지. 과감해진다. 공연음란죄.


시원한 몸과 마음으로 하지만 지친 기력으로 잠자리에 눕고 빠르게 잠의 깊은 수심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비몽과 사몽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즘, 정확히는 비몽에서 발을 빼고 사몽으로 옮긴 직후라고 생각된다.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소리가 들린다.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눈을 뜨지는 못한다. 소리는 계속해서 난다. 지붕이 무너지나 보다. 그럼 피해야지. 그런데 왜 몸은 그대로 누워만 있을까. 무섭다. '육각정 잔해에서 텐트와 함께 팬티 차림의 남성 발견' 이런 제목은 싫다.


소리의 정체는 다음날 아침에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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