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6

바람, 밤손님

by 아무개



아침.

무너진 잔해 속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뉴스에 나오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 엄청난 소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급하게 텐트 밖으로 나와 육각정의 대들보를 쳐다보았다. 부러지거나 균열이 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뭔가 미궁에 빠질 것 같은 불안함과 함께 텐트로 시선을 돌렸다. 텐트의 한쪽이 움푹 주저 앉았고 폴대는 부러져 높이 솟아 올라 있다. 제기랄. 저게 그렇게 무지막지한 소리를 냈다고? 텐트도 텐트지만 나는 지난밤의 소리가, 소리로만 놓고 보자면, 지옥의 문이 열리는 줄 알았는데.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부러뜨릴 수도 없고. 비상 대책반은 신발 위에서 소집하고 걸으며 생각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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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에 도착해서 일명 껌정색 전기테이프를 샀다. 나는 평소에도 이 절연테이프를 만능 도구로 사용한다. 만약 아서왕의 검도 이 테이프를 이용해 바위와 함께 칭칭 감아버렸다면 결코 검을 뽑지 못했을 것이며, 아서는 왕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묘산면 반포리의 육각정에 자리를 잡고 바로 옆집에 부탁을 드려 수건을 빨아 얼굴만 대충 씻었다. 샤워는 이삼일에 한 번만 하지 뭐. 끈적 거린다. 우선 부러진 폴대를 꺼내 잘 맞춘 다음 테이프를 감았다. 부러지기 전보다 더욱 강해지도록 팽팽하게 당겨 감았다. 아주 단단해졌다. '맥가이버'의 주제곡을 코로 흥얼거린다. 만족스러움에 뿌듯하다. 하지만 텐드를 설치하며 생각해 보니 아침에는 테이프를 다시 풀러야 했다. 적당히 할걸.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누웠다. 달은 밝았다. 그리고 바람이 많아진다. 밖에 가만히 있기에는 서늘할 정도의 체감온도를 느낀다. 바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차게 불었다. 심상치 않다. 불안이 바람을 타고 식어버린 어깨에 들러붙는다.


잠을 청하려 드러누웠지만 잠은 도착 시간을 맞추지 않는다. 제시간에 왔어도 바람 때문에 쉽게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람은 모든 것을 날려 버리겠다는 각오라도 했나 보다. 텐트가 들썩이고 한쪽으로 찌그러들며 뒤틀려 버린다. 밖으로 나가 보니 또 부러졌다. 맥가이버는 무슨.


방법이 없다. 퍼더덕 거리며 부풀었다 쪼그라들었다를 반복하는 텐트는 반쯤 바닥을 보이며 들썩인다. 안으로 들어가 내 몸무게라도 더하지 않으면 다 날아가 버릴것 같았다. 바람에 눌려 입구는 쪼그라진 개구멍이 되었다. 엎드려 입구에 머리를 들이민다. 바람은 몸과 텐트를 어긋나게 흔들어 댄다. 위기감과 불편함이 대범한 나를 짜증 나게 한다. 나는 소심하게 하찮은 바람의 광기를 나무란다. '지랄 발광을 하는구만' 몸을 텐트 안으로 들이밀었다. 우당탕!... 고꾸라졌다. 잠시 그대로 있었다. 헛웃음. 누가 지켜봤으면 싶다. 웃겼을 테니까.





잠을 이루려 뒤척이고 있는데 밖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냥 지나가기를 빌었다. 정자의 마루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혼자인가 봐" 여자의 목소리다. 귀가 열리자 잠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빠져 나갔다. 계속되는 이야기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빨리 가주었으면 싶다. 텐트 안에서는 누군가 잠을 자고 있거나 그러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누구세요?" 옆으로 누운 채 밖을 향해 물었다. 놀러 왔으며 둘이라고 한다. 혼자인지 묻는다.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묻고 답한다. 얼굴도 내밀지 않고 가려진 막을 사이에 두고, 피아를 구별하려는 절차는 금방 끝이 났다. 지퍼를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바로 옆에 남자와 여자가 앉아있다. 대학생인 이들은 이곳이 고향인 친구가 있어 함께 계곡에 놀러 왔다고 했다. 저녁에 술자리를 하다가 둘이서 살며시 데이트를 하러 온 것이다.


물리치료가 전공이라고 한다. 걸어서 서울까지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반응이 아침방송 방청객 보다 격하고 화려하다. '와~ 정말이요' '진짜요?' '믿을 수 없어요' '이런 사람을 처음 봐요' '대단하다' '신기해요' 계속해서 대화중에 감탄과 놀라움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표현한다. 어느새 내 어깨는 뽕이 겹겹이 쌓아 올려져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높아졌다.


자부심의 씨를 뿌렸으나 척박한 토양의 자아와, 소외된 겸손으로 인해 교만의 날개가 돋았다. 우쭐함. 허세. 이것들에 대한 투자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익을 내고, 그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버핏도 이런 것들에 대한 투자는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주가는 폭락하고 결국 상장 폐지 될 것이다. 허세와 교만은 공허한 슬픔의 뿌리만 남는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발의 물집과 근육통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역시 놀라움과 존경을 표한다. 나는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며 내 거룩한 의지가 비천한 발을 대신할 것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두 사람, 특히 여자의 존중과 찬사를 귓속에 가득 넣고, 애써 무심한 척하며 그 달콤함을 조용히 음미한다.


여자가 대뜸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한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발에는 온종일 흘러내린 분비물이 퇴적층으로 남아있다. 물적신 수건으로 얼굴 말고는 닦지도 않았다. 낯선 사람과 짧은 시간 동안 내밀함이라곤 없는, 따라서 감출 것도 없는 대화 몇 마디를 했을 뿐이다.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달빛이 그려낸 서로의 윤곽만 확인한 채로. 그런데 그렇게 불쑥.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방문을 열어젖히듯 제안을 한다. 잠깐의 혼란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였을까? 내밀함도 구체적인 시각적 감각 자료도 없었기 때문에. 희미한 대상의 윤곽 만으로 분석과 판단의 과정을 삭제하고, 가장 순수한 직관을 촉수로 편견이 생겨나기 이전에 맺은 관계라서 가능했을까. 거창하게는 보편적 인류애라고 부르는 타인에 대한 원초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것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영광의 시간을 선사하기 위해 성스러운 곳을 허락하기로 했다.


여자가 오른쪽 남자가 왼쪽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성씨라도 말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는 천 씨, 남자는 최 씨다. 솜씨는 여자가 더 나았다. '솜씨'는 성이 아니다. 여기서 오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덧 붙인다. 내가 여자라서 더 나은 평가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나를 향한 칭찬이나 존경심은 여자가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사실이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별개임을 밝힌다. 내 판단의 절차적 공정성을 의심하지 말기 바란다.


발과 종아리를 정성껏 주물러 준다. 두 사람의 따뜻함이 손을 통해 충분히 전달된다. 그래도 마사지 실력은 많이 부족하다. 그냥 밀가루 반죽하듯 주물럭 거리기만 한다.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직접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나는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준급의 발마사지 실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인정한 사람은 두 명뿐이지만.


두 사람에게 번갈아 가며 시범을 보였다. 통증과 함께 시원함을 느끼는 곳과 가장 긴장되어있는 근육들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능숙한 솜씨로 마사지를 해 주었다. 그런데 어쩌다 입장이 바뀌었을까. 잘난 척하다 바뀌었다. 열심히 설명하며 효과를 입증하려 노력했다. 여자의 발을 지압하다가 갑자기 남자 친구의 눈치를 의식하는 나를 발견한다. 남자는 그저 보고만 있다. 오히려 그런 염려를 하는 내가 더 이상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 편견의 뒤에 숨는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사람이다. 완벽하게 속물이다. 이 사실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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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저쨌든 그들은 나의 기술 전수와 신체 기부를 통해 발 마사지 실습을 하였다. 자정이 다 되어 나는 자리에 누웠다. 둘은 밖에서 눕는다. 텐트 안으로 초대하고 싶지만 일인용 잠자리는 너무 좁다. 그리고 허리를 펼 수 없게 지붕이 주저앉아 버렸다. 밖은 추울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게 방수 덮개를 주었다. 지퍼를 닫고 다시 누웠다. 한동안 몸을 움직이는 소리와 말소리가 섞여 들린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가까운 소리지만 멀리서 출발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는 없는 신비로운 느낌의 대화였다. 우정이나 사랑이 성대를 갖고 있다면 저렇게 보스락보스락 거리며 도란거리는 정겨운 소리를 낼 것이다.


두 사람이 돌아간다. 때를 맞추어 바람이 잦아든다. 분명 두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바람의 흥분을 가라 앉혔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가끔은 이렇게 행복한 신비주의자가 된다.


내게 순수한 시간을 선사한 연인들이여 행복하시라.




달이 휘영청 밝다.


사람이 더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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