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7

다사다난.

by 아무개




아침. 라면.

오른쪽 엄지발가락 쪽 발등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절뚝거리며 걷는다. 내리막 길은 체중이 앞으로 더해지는 만큼 통증도 심해져 발을 딛기가 힘들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가드레일을 붙잡고 몸을 지탱해 본다. 상태가 심각함을 알겠다. 체중이 발의 앞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뒤로 걸어 보았다. 평지가 나올 때까지만 이렇게 가면 된다. 이제 막 고개를 넘었다. 가야 할 길을 생각하니 입학식에 졸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득하다.


산책로나 공원에서 여자들이 건강을 위해 뒤로 걷는 것을 가끔 본 적 있다. 익숙하지 않은 장면은 시선을 잡는 힘이 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뒤로 걸을 줄이야. 한적한 산자락이라서 사람은 없고 차량도 가끔씩 지나간다. 차량이 가까워지면 운전자들의 시선을 잡는 힘을 빼고자 뒷걸음질을 멈춘다. 그리고 슬며시 몸을 돌려 앞을 향하고 먼 곳을 응시한다. 잠시 쉬며 여유롭게 경치를 감상하는 척.


비가 내린다. 처음으로 준비한 비옷을 입었다. 비옷은 배려심이 많다. 빗물을 막으라 했더니 무슨 부당한 명령이라도 받았다고 생각했나 보다. 통풍은 차단하고 누수는 허용한 기막힌 제품에 존중을 표한다. 빗물과 땀을 짧은 시간에 발효시킨 몸의 열기는 아열대의 습한 바람처럼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다. 미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비옷에 대한 배신감이 울컥하며 올라온다. 당장 벗어 버리고 싶다. 짜증.


상점에 들러 껌과 초코바를 구입하고 물을 얻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옥수수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물을 얻어 병을 가득 채우고 밖에 있는 의자에 잠시 쉬기 위해 앉았다. 아주머니가 내게로 온다. 뻔한 질문을 한다. 모범적인 뻔한 대답이 정중히 건너간다. 의문을 풀어준 내 대답을 듣고는 뻔하지만 확실한 자신의 생각을 짧지만 인상적인 동작으로 보여준다. 먹고 있던 옥수수를 자신의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본다. '돌았군.'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단순하며 깊이 있게 전달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의 나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 성별에 따른 반응이 상반되는데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보인다. 남자들은 '일등이다' 하며 엄지를 세우는 반면 여자들은 지름 곱하기 3.14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응원과 부러움 VS 핀잔과 비난. 성별이 갖는 제한적인 삶의 환경이 원인일까. 서로의 생각은 확실한 색깔을 띠며 대비된다. 이것을 서로에게는 편견이라 부르고 스스로는 가치관이라 부른다. 나는 그 가운데에 서서 관점이라는, 애매하고 비겁하지만 가장 안전한 그늘에 앉아 열심히 땀을 흘리는 그들을 응원한다.


혹시나 내가 남자라서 여자들의 생각에 반대한다거나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남자들의 격려를 받기 위해 내가 그들을 응원할 것이라는 오해는 마시길 바란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남은 여정 동안 직간접적인 대부분의 도움과 배려가 여자분들의 것이었으며, 그분들이 퍼부은 핀잔과 비난이, 내가 흠뻑 뒤집어쓰고 흥건히 젖은 그것이, 바로 연민의 정이라고 고백하며, 그것은 바닥에 고여 철벅거릴 만큼 충분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더불어 고백하자면 나는 매사에 중립적이지 않지만 중립적 인척 한다. 나는 언젠가 이 척 때문에 망할 거라고 확신한다.


옥수수 두 자루를 갖다 준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여자들은. 나는 세상이 지금보다 더 좋아지려면 모계사회로 낳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여자, 아니 엄마들은 세상을 이끌 자격이 있다. 따라서 세상이 모계사회로의 이행을 궁극적인 목표로 지향하면 성평등의 건널목도 일찍 넘어갈 수 있다. 내가 옥수수 두 자루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서른일곱 살의 아들이 장가를 못 가서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둘째 딸도 시집을 안 가고 막내아들 역시 마찬가지라며 물밑에서 오징어가 하나씩 낚여 올라오듯, 큰아들을 먼저 한숨 밖으로 토해내자 줄줄이 이어지는 한탄이 계속된다. 세명 모두 부족함 없이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막내는 일곱 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눈이 높아서 문제다. 맘에 들어하는 여자가 없다. 근심.


한숨을 쉴 때마다 걱정과 푸념으로 디자인한 두꺼운 외투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그러자 외투 속에 감추었던 자랑이라는 속살이 조금씩 드러난다.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겠다. 자식들은 기대에 부흥하며 잘 살아왔고 부모는 충분한 지원을 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자식들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평범한 결혼이라는 것을 아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애가 탄다. 한동안 타는 냄새를 풀풀 풍기고 밑반찬 한 봉지를 준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엄마들은. 반찬 봉지와 근심 한 덩어리를 덜어내어 코펠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이젠 좀 가벼워 지시길.






30분 정도 걸으니 더해진 반찬의 무게가 전신으로 느껴진다. 어깨는 벌써 일그러진 표정을 드러내며 제일 먼저 내게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시장에서 모자를 샀다. 삼천 원. 점심을 먹으며 반찬을 내놓고 뼈다귀 하나를 얻었다. 썩 좋은 흥정이었다. 여기서도 누군가의 엄마인 식당 주인의 인심을 얻었다. 작은 그릇을 주문했지만 행색을 보고 주방에다 큰 그릇에 담으라고 말한다. 밥도 많이 퍼 담으라고 당부한다. 밥을 먹으며 정치적인 포괄적 접근이 있었다. 의견의 일치를 보며 더욱더 힘찬 투쟁을 다짐한다. 고맙습니다.


거창읍에서 머무를까 하다가 조금 더 진행해 마리면에 도착했다. 정자에는 노인 세 분이 앉아 있다. 막걸리 두 병에 소시지와 구운 김을 안주로 준비해 인사를 올렸다. 대단한 칭찬이 이어진다. 역시 충청도 양반이라고. 막걸리 두 병에 양반을 샀다. 중세의 면죄부도 이런 식으로 사고팔았을까. 아, 거기는 와인으로 거래를 했겠다.


종이컵으로 술잔이 두어 배 오고 간 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과거를 향해 돛을 올렸다. 노를 저어주는 사람은 없지만 시간을 다스리는 정령의 입김이 부드럽게 불어와 항해는 시작되었다. 습기를 머금은 술잔이 내게로 전해지고 시간은 어느새 술이 잔을 채우듯 해방 이후의 시간들이 따라 채워졌다. 좌우로 대립하던 이념의 대리전부터 비극적인 전쟁을 삶의 중심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담담하지만 살아남은 자만이 표현 가능한 무게가 실려있다.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때에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노인이 말했다.

"이웃 사람을 산으로 유인해 돌로 때려서 죽이는데 글쎄 잘 안 죽더래. 그리고 하는 말이 '사람이 참으로 질기고 독하데' 하더라고"

"돌로요?"

혼잣말인지 되묻는 말인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어냈다.

"총소리가 나면 안 되니까."

비극.


이념이나 사상 따위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개인이나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의 지향을 정당화하는 것들은 전통이나 사상, 종교, 문화 등이 있다. 이것들은 사회와 개인의 심리에 내면화를 거쳐 신념의 바탕이 된다. 신념은 행동을 제어하는 기본 기제다. 그래서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잘못된 행위는 거대한 비극을 낳기도 한다. 히틀러. 그리고 신념은 다른 생각이나, 가치를 가진 대상을 적으로 규정한다. 신념의 원리가 수많은 비극을 잉태하는 잔혹한 성격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 되든 개 같은 것이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은 잘 지내고 가라는 당부를 하시고 각자 집으로 갔다. 텐트를 조립했다. 시간이 조금 이른 듯했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나를 허락했다. 한 사람만 빼고. 텐트를 치고 한가롭게 앉아있었다. 허락하지 않은 그 한 사람이 나타났다. 누구의 허락을 받았는지 묻는다.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것은 아니라는 듯이. 나도 안다. 그 마음. 이방인에 대한 경계나 외세의 침략과 압력에 맞서려는 그 저항정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 그 정신이 우리 가족과 마을과 국가를 지켜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텐트를 바로 해체했다. 발 빠른 모습을 보이자 너무 야박했다 싶었는지 아직은 다른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간이니 기다렸다 설치하라고 말한다. 우월감.


때로는 자존심도 없어 보이는 나약함이 완고해 보이는 벽을 허물거나 넘어서는 사다리가 되기도 한다. 적절히 비굴하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한 발 앞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나에게 불행한 사태이며 이 사태를 멈추거나 끝낼 수 있는 권능은 당신의 숨소리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처진 어깨와 비굴한 눈빛을 통해 느끼게 해 주면 된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힘과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한다. 확인이 끝나면 높은 자부심 위에 느긋하게 앉아서, 자신의 힘을 최대한 부드럽게 통제하며, 위선의 어깨를 늘어뜨린 불쌍한 자의 등을 자비로운 손길로 쓰다듬는다. 예외를 허락한다는 뜻이다. 나는 최소한의 예외가 최대의 은혜로 둔갑하는 기적을 본다. 그럼 된 거다.


기적을 보인자의 모습이 사라지자 한 남자가 다가와 방금 그 사람이 뭐라 하고 갔는지 묻는다. 텐트가 부활하게 된 기적을 말했더니 내편을 들어 위로를 해준다. 남자는 신축 보건소의 공사를 맡은 반장 목수라며 자기를 소개했다. 위로와 공감이 처진 어깨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남자는 아들만 셋이고 큰 아들은 군대에 갔다. 얼굴이 동안이기는 했지만 믿기지가 않아 재빠르게 산수를 시작했다. 남자가 21살 부인은 18살에 큰아들을 낳았다. 놀랍고 부럽기까지 했다. 생물학 적으로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해당되니까. 자부심도 높아 보인다. '내사 마 남자아이가?' 하는 의미가 말과 눈빛에 포인트로 누적되어 있다. 종아리에 멋진 문신이 남성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젊음의 열정을 뽀사가며 보낸 시간을 느낀다.


언제부터인지 남자 한 명이 옆에 앉아 나와 목수와의 대화를 들으며 웃고만 있다. 조용하고 수줍어 보이는 인상이다. 잠시 후 머리가 짧은, 일명 스포츠머리를 한 사람이 다가와 앉는다. 오십대로 보이는 남자는 방금 이발소에서 나온 것 같다. 얼굴이 말끔하고 이곳 토박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영역 안에서의 편안함 과 위세가 느껴진다. 목수는 옆에 짓고 있는 보건소 건물의 디자인이 특이해서 일이 까다롭다며, 말속에 그런 일을 충분히 해내는 자신의 능력과 자부심을 잘 버무려 표 나지 않게 이야기한다. 그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해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스포츠맨이 그럼 하루 할 일을 이틀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에 목수가 불편함을 감추지 않고 말한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소!" 분위기는 방향 전환을 한다. 스포츠맨도 예상치 못한 불편함에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며 따진다. 까다로워 시간이 오래 걸리면 공사 기간을 좀 더 늘리면 되지 않느냐 이거다. 맞는 말이긴 한데.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목수는 조금 더 흥분한다. 스포츠맨은 자신의 주장을 다시 말하려다 급정거를 하더니 방향을 급히 돌린다. "이 개xx 씨xxx x같은 xx끼!" 이건 뭔가. 갑자기. 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숨을 두 번 들이마실 동안 반응의 형식을 정리한다. 그리고 천천히, 약간은 공포스러운 속도로 스포츠맨의 얼굴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얼굴을 들이댄다. 서로의 코가 닿을 지경으로 가까이서 분노의 눈 맞춤을 계속한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긴장이 어색함으로 바뀌려 할 때 목수가 말한다. "야 이 xxx끼 xx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두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그리고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과 변형된 것, 전혀 알지 못하는 것,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심지어 집현전 학자들은 물론 세종대왕도 넋을 잃고 말 정도의 모든 욕들을 상대에게 무차별적으로 휘둘러 버린다. 초토화 작전.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욕들의 분량은 8톤 트럭 십만 대 분량은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며 욕들의 물량이 바닥이 나고 서서히 강도가 약해지더니 스포츠맨이 음조를 바꾸어 말한다. "아재 보소...." 생략. 그리고 두 사람은 충분한 해명도 없이 급 화해를 단행한다. 남북미 평화 프로세스도 이렇게 진행됐으면 좋겠다. 욕에 비하면 화해의 분량은 120g도 채 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는 지금의 진정 국면이 더욱 적응하기 힘들다. 두 사람 모두 쿨하다 못해 절대온도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그런데 주먹은 어디로 갔을까. 주먹보다 혀가 강하다.


한껏 높아졌던 긴장과 기대를 모두 저버린 두 사람은 화해와 함께 돌아갔다. 찝찝한 감정의 찌꺼기는 그대로 둔 채로.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것들을 쓸어 담아 버렸다. 갖고 갈 수는 없으니까. 모두 돌아갔다. 뭔가 빠져나간 듯 마음이 노을과 함께 아득히 멀어진다.


그들이 돌아간 자리에 허전함이 슬그머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나는 말했다.

"저리 가..."




그래도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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