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달빛이 밝았다.
대기는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달빛은 멀리 가지 못했다.
구름이 이따금 달 앞을 지나갔다.
나는 그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그곳의 기억만 불러올 수 있어도 나는 기쁠 것이다.
두려움을 불러 올 수만 있다면.
두려움은 계절이 다를 만큼 먼 곳에서도
사람들의 혀끝에서 고향의 사투리를 발견하는 순간
치욕과 수치를 안겨 준 말들과 함께 되살아 난다.
마른땅의 붉은 발자국은 조롱 섞인 부모의 거짓말에 속아 울던 아이를 보게 한다.
나약한 연민은 시간의 주머니를 채우고 노래를 한다.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다.
두려움이 주는 절망이기에, 나는 그에게 두려움을 줄 것이다.
그는 파괴적인 시간을 맞이 할 것이다. 추억으로 인하여...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라는 형식 앞에서
기억을 건너온 추억은 아름답기 마련이고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너무 늦은,
지금이라서.
기억의 다리를 건너 추억의 숲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로
불가능이 아니라, 너무 늦었음을 알기에.
두려운 것이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을성이 부족한 혀가 꿈틀거렸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침묵만이 그를 상대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잠이 든 것일까. 어부는 기척 없이 허파를 부풀렸고 그 가슴이 내 등을 누르고 있었다. 저걱이는 발소리는 정강이를 때리며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어금니에서 흙 알갱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발이 흙을 씹고 있던가.
달빛은 냉정하게 안갯속에 머물렀다. "어디로 가는 거요"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그의 가슴에서 울린 말이 등을 뚫고 들어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진동했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마른침을 삼키자 기침이 터지려고 했다. 애써 숨을 누르고 그에게 되물었다. "어디를 가는 것 같습니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모르겠소" 그의 말은 갑자기 내 등을 확 떠밀었다. 고꾸라지지 않으려 발을 멈췄다. 땅 밑으로 심장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몸이 차가워지고 털구멍이 솟아올랐다.
서늘한 공기와 달빛을 깊이 마셨다. 목구멍을 지나며 이성을 잃은 달빛은 폐에서 피를 뜨겁게 했다. 피부에 온기가 돌고 열정이 굳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작은 불씨가 타올라 불덩이가 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크흑.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펴자 불덩어리가 위로 치고 올라와 머리통을 뚫고 흩어졌다.
열정은, 뻗뻗해진 목뼈를 비틀고 기지개를 켠다. 신선한 아침 이슬은 한낮의 들끓는 빛을 요구한다. 분노에 감염된 열정은 왜 부서지고 웅크려 있었는지 논쟁하지 않는다. 침묵한다. 때가 되면 빛이 이슬을 태울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면 될 일이다. 존재의 시작이다. 삶의 힘이다.
정신은, 영혼이라는 불투명한 유리를 깨고 나와 팽창하며 순수의 틈을 찢고 나간다. 그것은 태풍이 지나간 뒤 고요한 숲의 흩어진 격정 같은 것이었는데, 거대한 힘의 응집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간 것 같지만 사실은 산만한 숲과 난잡한 아우성을 틀어막고, 사슴과 멧돼지의 흔적을 지우고, 팔랑이던 잎들을 후려쳐 떨치고, 빛을 갈라놓았던 줄기와 가지들을 꺾어, 구부정한 능선에 무겁게 짓밟아 놓았다. 나른하기까지 했던 교만한 숲의 분산된 힘은 낮고 좁은 공간 안에 폭행당한 채 엎드려, 나태했던 시간을 후회하고, 비로소 난폭함이 무엇을 목적하는지 알았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달이 하늘 멀리 하얗게 붙어있었다. 새벽보다 아침이 더 가까이 있었다. 그를 내려놓았다. 그는 오래된 헝겊처럼 바닥에 펼쳐졌다. 누운 채로 숨을 몰아 쉬며 하늘을 응시했다. 나는 그를 묻을 만큼 충분히 돌을 주워 모았다. "나를 좀 앉혀 주시오" 그가 말했다. 부탁인지 요청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아직도 단단하게 울렸다. 그것이 싫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도랑에 눕히고 싶었다. 그가 눈을 뜨고 있을 때, 말을 마치기 전에 그를 묻고 싶었다. 나는 가장 무거운 돌을 그의 가슴에 올릴 것이다.
바위에 그를 기대어 놓았다. 산의 한쪽을 지탱하고 있는 바위는 물을 가득 먹고 검은빛을 주룩 흘려보내고 있었다. 반쯤 펼친 부채 모양으로 넓어진 바위는 양쪽 어깨를 움츠리고 좁아지다가 가운데가 불쑥 솟아 올라 뾰족했다. 부리를 하늘로 향한 새의 모양이었다. 새는 거대한 산의 무게를 몸으로 받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새의 부리가 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산 위쪽에서 노란빛이 나무들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때를 맞춰 바람이 잎들을 고르게 빗질하며 쓸어 넘겨주었다. 마른 잎들이 허공으로 가볍게 뛰쳐나와 팔랑이며 떠다닌다. 잎 하나를 놓치지 않고 눈으로 좇았다. 빙글거리며 내려오던 잎은 몇 번을 오르내리며 흔적 없이 공중에 선을 그렸다. 산 아래로 멀어지던 잎이 바람에 얹혀 둥실 올랐다가 돌무더기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가볍고 모난 소리가 가슴에서 허망하게 울렸다.
태양빛이 그의 허리를 지나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새는 깊은 바다처럼 검푸르게 빛나며 그의 등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이대로 있게 해 주시오" 그가 말했다. 핏기 없는 얼굴은 밤처럼 고요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도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예정된 계시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친, 새로운 운명을 기다리는 까마귀였다.
작은 새 두 마리가 자리를 옮겨가며 지저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태양을 눈에 담고 있었다. 태양은 미래의 시간을 비추지만,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잠긴다. 그것이 태양의 미래다. 가끔씩 느리게 부풀어 오르던 그의 가슴은 바람이 멈춘 호수처럼 잔잔했다. 시간도 시무룩 해졌다. 이제는 그에게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그러나 내가 이대로 떠나는 것이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하려고 했던 이별의 인사를 거부하려는 지금의 행동이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발걸음도 못 미더운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빨라졌다.
몸은 가벼웠고 머릿속은 우주를 담은 겨울 공기가 흐름을 멈추고 있었다. 고요한 공간은 가볍고 거침없이 명료했다. 길은 분명 하나였으며 무한히 자유로웠다. 그리고 어떤 흥분이, 모든 게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확신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신이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마지막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