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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Nov 07. 2023

버스의 이름은 세미디럭스.

싸늘하다... 코끝이 쒜에~ 하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함께 일어난 인플루엔자와 아침인사를 했다.  분명 밤새 천장에서 붕붕거리던 팬 소리에 깨어난 것이 틀림없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어젯밤 남겨 둔 닭꼬치를 입에 넣는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꼬치는 완벽하게 건조되어 있다. 마른 장작의 맛이 어떤지 알고 싶다면 꼬치 반쪽만 먹어도 충분하다. 이 닭꼬치에 비하면 군용 건빵은 차라리 촉촉한 물만두에 더 가까운 편이다. 슬프지 않은데 목이 메었다.  특별한 조리법이 있나 보다. 감탄했다.


마날리로 떠나기 전 휴대용 부탄가스를 구해야 한다. 부탄가스라니?  당연히 여러분들은 무슨 소린가 할 것이다. 밥을 해 먹으려면 필요하다. 아니 국토 대장정도 아니고 왜 인도까지 와서 밥을 해 먹는지 이상하겠지만, 내 여행의 목적과 수단이 그것과 비슷하다. 앞으로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만 시간이 되면 짧게 전후 사정을 말하도록 하겠다.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잃어버린 혈육의 이름을 부르듯 뒤틀린 혀로 "가스!"를 외쳤다. 그러나 가스를 지니고 있거나 본 사람은 없었다. 아~ 가스야... 


너윈에게 전화를 해 보는 수밖에 없다. 너윈. 그를 잠깐 소개를 하자면, 아니 소개는 길고 짧게 언급하자면 그는 서울의 불교 관련 여행사에서 근무하던 인도 청년이다. 지금은 인도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그렇다고 들었다. 우선 마날리에 함께 가기로 한 여자들의 숙소로 갔다. 앞으로 그들 두 명은 실명을 피하고 '큰 연'과 '작은 연'으로 지칭하겠다. 이유는 첫째,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지 못했고 둘째, 그들의 이름이 소연, 혜연처럼 연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 호칭이 아쉬운 점은 큰 연 작은 연 하며 말할 때 발음이 매너를 잃고 거칠어진다는 것이다. 조심하기 바란다.


두 연들이 묵고 있는 숙소의 매니저와 만났다. 어떻게 시작 됐는지 우리는 '하미오르 사티'라는 말을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친구라는 뜻이다. 가스를 사야 한다고 했더니 자신이 주겠다고 한다. 정말? 오해가 없도록 철저한 검증을 거쳐 진심임을 알았다. 소통에 많은 단어와 긴 말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었다. 친밀함이 DMZ를 평화와 화합의 지대로 만드는 법이다. 그는 나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 있게 가스를 소개했다. 가스통은 무릎보다 낮은 높이에 둥글고 통통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붉게 녹슨 자태를 드러냈다. 5kg 정도는 충분해 보였다.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가스통이었다. 나는 내 배낭이 30kg이 넘는다는 사실보다는 그 주방용 가스와 내 버너를 연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래도 충분히 고맙고, 앞으로도 '하미오르 사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나의 사티는 많이 아쉬워한다. 


나는 그가 행복하도록 나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내가 너윈에게 전화를 할 수 있게, 그가 기쁜 마음으로 나를 돕도록 그의 휴대폰을 요구했다. 너윈에게 전화를 했다. 너윈은 가스를 줄 수 있다고 한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바꿔 주고 힌디어로 주소를 적게 했다. 이제 오토릭샤를 타고 주소지로 가면 된다. 매니저는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주소지까지 요금을 물어보니 100~150루피 정도라고 한다. 마음 같아선 그에게 더 큰 기쁨을 주고 싶었다. 왕복요금을 지불할 기회를 말이다. 그랬다면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내 품에 안기겠지. 그러나 아쉬움이 오래 기억된다는 나의 지론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미안. 나의 친구여.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자 등줄기에 땀방울이 흘렀다. 어느새 옷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상반신의 실루엣은 분명 섹시했다.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샤워를 괜히 했다. 오토릭샤 요금은 이미 내 안에서 흥정이 시작되었다. 흥정의 마지노선을 적당히 생각하며 오토릭샤 사냥에 나섰다. 어디 보자. 착하디 착한 운전수가 어디 있나. 그때 눈빛에서 총기와 의욕이 사라진, 순박하게 얼굴의 주름이 지면을 향한 운전수를 발견한다. 주소지까지 450루피를 요구한다. 순박한 건 주름뿐이었다. 현지 가격은 150이면 충분하다. 흥정을 시도했다. 그는 구호단체의 홍보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처량한 얼굴로 간절히 말한다. "쏘 파... 베리 쏘 파~" 무지하게 멀다는 그놈의 파~ 밀당이 지루해질 때쯤 나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한다. "라스트 프라이스. 포헌드레드!" 그는 알았다며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한다. 


레이스 시작. 이곳의 모든 운전수는 생활의 달인이다. 너윈은 가스 네 개를 가지고 나왔다. 고마운 친구다. 너무 멀다며 두 시간이 걸린다더니 30분이나 빨리 볼일을 마쳤다. 그래도 약속했으니 400루피를 지불해야 한다. 일찍 끝났으니 350루피만 하자고 말하면 양아치로 보이겠지? 아닌 척 하자. 500루피 지폐를 건넸다. 당연한 듯이 잔돈을 바꾸러 어디론가 사라진다. 백 루피 한 장이 없나? 나는 멀뚱이 5분 넘게 기다렸다. 몹쓸 의심병이 내 주위를 배회한다.


잠시 후 돌아온 운전수가 잔돈을 준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돌아서 걸으며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으려는데, 머리에 혈류량이 급격히 치솟았다. 눈알에 피가 몰리며 불꽃이 번쩍였다. 이 자식이 나를 뭘로 보고... 이 따위 거지 같은 짓거리를... 내 손엔 50루피. 100루피가 아니었다. 나를 기만하고, 업신여겼다. 


커다란 인류애를 바탕으로 단돈 50루피를 더 깎아 보려던 양아치의 심장에 칼을 꽂고 신탁의 예언을 받드는 거룩한 마음과 싯다르타의 자비를 빌어 존중을 다했음에도 상호 약속의 징표를 짐승의 썩은 이빨로 갈가리 찢어 놓다니! 오~ 인류의 적과 내가 함께 했었구나! 이러한 자에게 농락을 당한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얼마나 하찮은가. 얼마나 무지한가. 미망에 사로잡혀 그 거대한 짐승의 썩은 혀를 방석삼아 자리에 눕다니! 두 발로 서있을 자격조차 없다. 엎드려 네발로 기어야 마땅하다. 나는 그대로 서있었다. 멍하니.


그자의 흐뭇한 미소가 자꾸 떠올랐다. 약이 올라 죽을 것 같다. 일정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그자를 반드시 잡아 돈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발걸음은 계속 숙소 방향으로 움직인다. 모든 참사는 빠른 수습이 우선이다. 원인 규명이나 책임은 그다음이다. 감정의 수습을 위해 관점의 변화를 강제한다. '계약서를 작성한 것은 아니지. 계약도 파기할 수 있어. 흥정은 흥정일 뿐. 뭐 환율로는 1200원 정도의 가치야. 그 정도는 지하철 입구에서 적선을 하기도 했는데. 그 작자는 하루 종일 행복 하겠지. 누구든 행복하다면 그건 좋은 거야. 그럼 됐지 뭐. 된 거야. 인생 별거 있나. 다 그런 거지 허허...' 이러다 해탈하겠다. 그래도 한 마디는 해야겠다. 행복해라... 개떡 같은 인간아.


한국 식당에서 두 연을 기다리는 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며 여행을 함께 온 여자 둘과 수다를 떨었다. 쓸모없는 말들. 두 연이 도착해 마날리행 버스를 예약한 여행사를 찾아간다. 점심 후 오침시간이라며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우리야 돈을 다 지불했지만 새로운 고객이 오면 어쩌려고 이러지? 나는 그들의 사업 방식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어쩌려고 이러지?-  아무튼 먹고 자는 그들의 권리는 침해받지 않았다. 


도로 옆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21살의 한국인 여행자를 만났다. 간호학과 학생이다. 예비 간호사는 에어컨이 작동하는 디럭스 버스를 예약했다. 그런데 다른 예약자와 비교를 해보니 바가지를 왕창 썼다. 약간의 위로와 충고를 했다. 충고는 잘난 척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우왕좌왕도 충분히 한 후에, 몇 번의 착오를 거친 후에, 두 연과 나는 예비 간호사와 디럭스 버스에 승차한다.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있는 곳까지만 태워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모두가 행복해한다. 하지만 우리는 디럭스가 아닌 세미디럭스로 갈아타야 한다. 세미라면 거의 비슷하겠지. 그래도 그냥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고 함께 떠들어댄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기를 바란다. 두 연은 조수와 눈을 마주치거나 그가 조금만 뒤를 돌아보아도 깜짝 놀란다. 언제 내리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서로들 그런 모습이 우스워 킬킬대며 웃다가... 하차. 


 'SEMI DELUXE' 버스의 앞과 옆면 전체를 차지한 알파벳이 눈에 들어온다. 세미디럭스는 세미폐차에 가까웠다. 녹슬고 찌그러지고 벗겨져 너덜한 모습이 형용사가 아닌 고유명사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세미디럭스는 과거형이었다. 과한 크기의 문자는 온몸에 문신을 한 겁쟁이가 한겨울 민소매를 입고 추위에 떨고 있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름에 속아서는 안된다. 내 친구 진00의 딸 이름이 진달래다. 하지만 그 아이는 꽃이 아니다. 그냥 이름이 진달래다. 세미디럭스도 그냥 버스의 이름이다. 어쩌면 버스의 과거 이력이 세미디럭스 했는지는 모르겠다. 


배낭을 화물칸에 넣으려는데 운전수가 갖고 타라 한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군말 없이 배낭을 앞으로 메고 올라탔다. 북적거리는 좁은 통로는 배낭을 놓을 자리는커녕 지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아놔~ 날도 더운데 이건 뭐야. 다시 뇌의 편도체에 혈류량이 급증하며 입에서 가시가 돋아났다. 고개를 돌려 운전수에게 다짜고짜 소리쳤다. "야! 둘 데가 없잖아" 물론 한국말로. 운전수는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나는 더 길고 뾰족한 가시를 세차게 뱉었다. "안된다니까! 이씨~" 역시 한국말. 그러자 바로 화물칸에 넣으라고 한다. 어라? 알아듣네. 표정과 억양 만으로도 단순한 의미 전달은 충분한가 보다. 배낭을 화물칸에 넣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내게 말을 한다. "투엔티 루피" 화물비를 내라는 것이다. 하. 참 얘네들은 한순간도 낭비를 하지 않고 창조경제를 실천한다. 이번에는 가시가 아니라 두꺼운 몽둥이를 입으로 뱉었다. "노노!" 거친 손사래까지. 그는 웃으며 나를 흉내 냈다. "노노!" 민망해서일까 아니면 나를 놀리는 것일까. 의미는 내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


마날리로 출발. 예상 소요시간은 대략 17시간. 빈 좌석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정차를 한다. 그나마 창으로 들어오던 후덥지근한 바람도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함께 멈춘다. 덥다. 그만 태우고 빨리 가자. 뉴델리를 벗어나자 좌석을 다 채운 버스는 그제서 만족한 듯이 엉덩이를 세차게 흔들며 달린다. 더운 바람이 더욱 뜨거워져 들이친다. 하~악~


이렇게 세미디럭스 버스는 세미하이웨이를 세미고속력으로 세미프로 투어리스트를 태우고 세미클래식한 음악을 들려주며 마날리로 향한다.




언제나 내게 동력을 불어넣는 고마운 조카에게. �

2023.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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