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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씨 Jul 21. 2021

11시 59분 50초

잘하고자 할수록 못하게 되는 마음

11시 59분 50초.

며칠 전 밤 내가 눈 여기던 회사를 지원한 시각이다.


10초만 넘었어도, 지원 기간이 지나 그간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을 것이다.

변명을 먼저 하자면 가고 싶은 회사였기에, 자소서와 과제를 대충할 수가 없었다. 

잘하고 싶다는 부담은 결국 시작을 늦게 만들고, 작은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엔터를 가까스로 누르고, 한숨을 몰아쉬자 이내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1초가 급박하게 보내느라, 정작 지원 이메일을 보낼 때 엉망진창이었다. 적절한 인사도, 감사 인사도, 연락처 기재도 없이 배짱 좋게 '마케터 지원합니다.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내드립니다.'라는 문구를 휘갈기고(?) 메일을 보내버렸다. 

 

'나를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면 어쩌지.' 

'이메일은 나름 첫인상일 텐데 이렇게 성의 없게 보내서 자소서와 과제까지 성의없이 했을 거라 보면 어쩌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잘 정리해서 깔끔하게 보냈을 텐데.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미리 과제를 시작했을 텐데.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다음날 오전 11시 59분쯤에는 어김없이 취업스터디의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 지원서와 과제로 이틀간 8시간씩 몰두한 다음이었는지, 과제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그간 몇 번의 리듬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인데, 이럴 때는 그냥 적당히 풀어져야 가장 빠르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 지원이라는 큰 산 하나를 넘었으니 잠깐 환기를 해도 되겠지. 

간만에 죄책감 없이 재밌는 걸 해보자. 

전시를 볼까. 어디 구경을 갈까. 책을 하나 살까. 

아니, 더워.

무더위를 날려줄 시원하고 강렬한 게 있으면 좋겠다. 그래 액션 영화다. 마침 블랙위도우가 하는군. 좋았어.




시간에 맞춰 영화관에 도착했다. 코로나 시기 이후 영화관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 없는 동안 크게 달라진 것은 없군.' 

예약 번호로 입장권을 뽑으러 갔더니, 모바일로도 입장권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모바일 입장권을 보여주고 들어가려 하니 발열 체크와 개인 인증을 해야 한다나? 

조금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며 이것저것 핸드폰으로 후딱 처리했다. 나는 밀레니얼 세대니까. 


상영관에 들어가니 광고가 흘러나오는 아주 좋은 타이밍.

넓은 관을 둘러보니 좌석들이 끈으로 묶여 앉을 수 있는 좌석들끼리 거리 두기가 되고 있었다.

상영관 맨 뒷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듬성듬성 한 10명쯤 앉았을까. 

그 와중 눈에 띈 커플이 있었는데, 60~70대쯤 돼 보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이었다. 


가벼운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할아버지,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신 할머니.

뒷모습만을 힐끗 볼뿐인데도 두 분 다 예쁘게 꾸며 입으신 것을 알 수 있었다.


특별한 기념일이었을까?

아니면 한 달에 한번 약속한 데이트였을까?

할아버지가 오늘을 준비하셨을까?

할아버지는 어쩌다 이 영화를 골랐을까.

영화를 고르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관에 도착해 체온 검사와 개인 인증까지 마치고 입장하는 길이 어렵게 느껴지시진 않았을까?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사실 굉장히 능숙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두 분이 영화관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정성 들인 마음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행동들이 있는 것 같은데, 평범한 것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순간이 그런 것일 테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젊음보다 그들의 늙음이 더 빛나 보였다.


뒷모습만 보아도 정성 들인 마음이 느껴지는 것.

나의 지원서가 그렇게 보이지 못한 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

들인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능숙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AROUND 잡지에 실린 프릳츠 김병기 대표님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직원들 개인의 삶이 행복해야 서비스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신 대목이 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즐거움이나 활기참 같은 것이 전달될 수 있었으면 했죠. 개인의 삶이 여유로워야 손님과 동료들을 돌아볼 수 있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거죠.



행복한 지원자가 되어, 여유로운 지원자가 되어 

뒷모습만으로도 회사가 궁금해할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인사이트를 얻는다.

할 일이 많아졌다. 부지런히 더 준비되는 사람이 돼야겠다.


오랫동안 손잡고 함께 갈 수 있는 짝을 찾는다는 것은 축복 된 일이다.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회사 사이에서도 통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할아버지의 걸음으로도 되었다면 나도 내 걸음으로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젊음에서 나오는 힘을 악용하지 말고, 미리 준비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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