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순간들이 모여 나를 이해하게 됐다
첫 병원을 퇴사하고 나서 한동안
나는 거의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텅 빈 느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진짜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겠구나…’
그 불안이 나를 조금씩 깨웠다.
이대로 가라앉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아직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급성기 병원으로 돌아갈 자신은 없었다.
첫 병원에서도 결국 버티지 못했는데,
다른 병원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덜 힘들다고 알려진 요양병원을 선택했다.
그게 나한테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거기도 쉽지 않았다.
원무과가 ‘갑’이었고,
간호사는 늘 눈치를 봐야 했다.
입사 첫 2주는 간호조무사 선생님께 의료행위를 배웠다.
‘이게 맞는 걸까…’
마음 한구석이 계속 걸렸지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참았다.
2주가 지나고 나서는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 채
혼자 책임 간호사 업무를 맡게 되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실수도 잦았다.
나는 어렸고, 경력도 없어서
몇몇 간호조무사 선생님들과 간병인에게
무시도 당했다.
대부분의 상황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조금씩 알아갔다.
나는 누군가에게 일을 지시하거나,
단호하게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누굴 시키는 건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 점이 책임 간호사에게는 큰 약점이라는 걸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응급상황에서 얼어붙는 나였다.
심장은 쿵 내려앉았고
머리는 새하얘졌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심폐소생술 금지(DNR) 환자였는데도 그랬다.
죽음을 앞둔 공기.
그 마지막 순간의 무게.
책임간호사로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게 정말 괜찮은 선택일까.
내가 뭘 놓친 건 아닐까.
의심
불안
죄책감
죽음은 일상이었지만
나는 그 일상에 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루틴한 업무는 견딜 만했다.
서류 작업, 환자 식사 수발, 약 확인, 환자 기록 정리 같은
반복되는 일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일이 익숙해질수록,
마음 한편에는 점점 깊은 공허가 스며들었다.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 뒤에는
마치 나아갈 길이 막힌 듯한 답답함이 있었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게 내가 꿈꿨던 간호사의 모습일까?’
스스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간호사라는 직업에도
정말 많은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중에서 나에게 잘 맞는 곳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혈액원 간호사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혈액원은
응급상황이 거의 없고,
루틴한 업무가 많고,
간호사들끼리 수평적인 분위기라는 점에서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고,
나답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요양병원에서 근무하지 않았다면,
만약 책임간호사로 일해보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몰랐을지도 모른다.
겪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실패처럼 느껴졌던 그 모든 순간들이
결국은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내게 맞는 길을 다시 고를 수 있었다.
조금 돌아왔지만,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이제 내 속도를 알고,
내 방식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