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초등학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
초등학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다닌 곳, 지금은 초등학교이지만
어린 시절엔 '국민학교'라고 불렀습니다.
'라면에 우유를 말아먹으면 안된다'
학교에서 배운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그래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이따위 것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지금도 난 다 끓인 라면에 우유를 넣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다 끓인 라면에 우유는 최악의 궁합입니다.
최악의 궁합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음, 뭐랄까? 하면 안되는 일,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혀로 팔꿈치를 핧을 수 없듯 말입니다.
이제는 이름이 바뀌었으니 초등학교라고 부르는게 맞을 듯합니다만
아직도 난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더 친근합니다.
아무리 일제시대의 잔재라고는 하지만
국민학교라는 단어 역시 나의 어린시절 추억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선 점심 급식을 주었습니다.
사실 매일 주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서
매일 급식을 주었나 봅니다.
그때 먹었던 많은 음식이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식판에 담아 주었던 다 퍼져 라면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라면과
함께 주었던 삼각우유는 생각납니다.
라면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했던 라면이지만
초딩에게 라면은 과연 신의 음식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식당 옆 교실이라 식당에서 라면 냄새가 날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럴때면 교실을 빼곡히 메운 거의 60명 가까운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면인가봐?" 하고 누군가가 말했고
이 이야기는 전염병처럼 번져갔고 교실은 소란해 집니다.
조용히 시키는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에도
이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떠드는 사람, 라면 안준다!"라는 협박에 교실은 삽시간 조용해 집니다.
참 치사합니다. 먹는거 가지고...
그래도 얻어 먹으려면 말을 들어야합니다.
비록 라면을 주는 사람이 선생님은 아니지만 말이죠.
학생들의 표정에는 '라면이 맞구나!'라는 안도감으로
평화가 얼굴에 깃들고 벌써 군침을 삼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얼굴과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식판을 채우던 퍼진 라면 면발은 나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반짝이는 네모난 스텐레스 식판은 다섯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래쪽엔 밥을 담는 큰 네모난 칸, 국을 담는 큰 동그란 칸,
그리고 위쪽에 반찬을 담는 세개의 칸을 되어 있습니다.
큰 네모난 칸에 팅팅 불어 다 퍼진 라면이 채워지고
반찬칸에 김치 몇 조각이 담겨집니다.
그리고 삼각 우유는 큰 동그란 칸에 놓습니다.
라면의 면발은 탱탱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한 사람으로 써,
일부러 라면의 면발을 팅팅 불린건
식재료비를 아끼기 위한 학교측의 횡포가 아니었나?'하는
쓰잘데기 없는 음모론을 펼쳐봅니다.
어쨌던 식당이 턱 없이 비좁아 우리반 아이들은
분위기 있게 운동장 옆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점심을 먹었습니다.
라면을 받아든 난 식판을 조심스레 들고
반 아이들이 모인 나무 그늘 아래로 갔습니다.
라면이 점심으로 나온 그 아름다운 날,
나의 옆에는 내가 좋아하던 옆집 민지가 앉았습니다.
민지는 시골아이같지 않게 얼굴이 뽀얏고 우아한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우아한 옷이라고 해 봐야 깨끗한 원피스였지만
나에게는 동화속 공주님같아 보였습니다.
햇빛에 그을려 새까메진 시골 아이들 사이에 민지는
까마귀밭의 백로같았습니다.
아니 까만 연탄과 흰눈이 좀 더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민지' 이름도 참 이뻤습니다.
나는 나와 민지가 황순원씨의 소나기에 나오는
시골아이와 윤 초씨네 증손녀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옆에 앉아 다 퍼진 라면을 우아하게 먹던 민지가
"라면이 너무 맵다"라며 손바람으로 혀를 식혔습니다.
나에게 이야기 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 이야기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난 그만
"물 갔다 줄까?"라고 추책없이 물었습니다.
살짝 당황한 민지는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민지는 삼각우유의 한 쪽 끝을 살짝 뜯어 라면에 넣었습니다.
직감적으로 몹쓸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지는 무엇을 해도 우아합니다.
그리고 나를 보며
"이렇게 먹으면 안 맵고 고소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민지는 진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자주 먹어" 거짓말을 했습니다.
"진짜?"
"응, 진짜지"
"나 말고 이렇게 먹는 사람 처음 봤어"라고 말하며
민지는 생긋 웃었습니다.
"옆집에 살아서 그런가? 우리 잘 통하네 ㅎㅎ"
벙글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러게"하고 민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퍼진 라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알 수는 없지만
참으로 행복하고 멋진 점심입니다.
그리고 보란듯이 용기를 내어 삼각 우유를 뜯었습니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우유가 식판과 옷에 튀었지만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이제 민지와 난 잘 통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우유였습니다.
지금도 우유는 먹지 않습니다.
지금도 먹고 나면 속이 이상하고 울렁거립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유를 싫어하게 된 게 그 때부터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우유를 싫어 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쨌던 우유를 라면이 듣 칸에 들이 부었습니다.
민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유를 그렇게 많이 넣어?"라고 물었습니다.
"나 라면에 우유 넣어 먹는거 좋아해!"라고 우쭐거리며 말했습니다.
민지는 참 친절한 아이입니다.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라면은 이제 돼지죽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아마 돼지도 먹지 않을 것이 분명하겠지만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돼지에게는 미안합니다.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민지가 나를 쳐다보고 있어 심장이 두근거렸고
돼지죽같은 것을 내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에 심장이 더 두근거렸습니다.
냄새를 맡아 보았습니다.
정신이 아찔해졌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포기 할 수 있나요?
'에라 모르겠다' 젓가락으로 퍼진 면말을 잡으려니
우유때문에 미끈거려 면발이 잡히지 않습니다.
"숫가락으로 먹어~" 민지가 웃으며 숫가락을 들어 보입니다.
울고 싶어졌습니다.
쥐고 있던 숫가락을 땅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왜 라면 먹는데 숫가락을 들고 왔을까?'후회가 밀려 왔지만
이미 손에는 숫가락이 들려져 있습니다.
"아~!"라는 짧은 대답을 하고 썩은 돼지죽을 퍼서 입에 넣었습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극악무도한 맛이 입안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목구녕뒤로 라면을 넘겼습니다.
욕지기가 나왔지만 민지가 보고 있어 참았습니다.
"잘 먹네 ㅎㅎ" 민지는 해 맑게 웃으며 라면을 먹었습니다.
욕지기를 참으며 웃음인지 울음인지도 모를 표정을 하고
한 입 더 입 안에 넣고 목구녕뒤로 다시 라면을 넘겼습니다.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그렇게 몇 숫가락 더 목구녕뒤로 라면을 넘겼습니다.
배멀미를 하는 것 처럼 울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손바닥이 축축해졌습니다.
멀미는 어느 한계치를 넘으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가 그랬습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습니다.
화장실로 뛰어가야 하는데 화장실은 너무 멉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무 뒤 담벼락이 적당할 듯 했습니다.
조심스레 식판을 내려 놓았습니다.
"다 먹었어?" 민지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나무 뒤 담벼락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맛있는 라면 국물과 새하얀 우유가 섞인 돼지...
딴에는 최대한 멀리 뛰어갔지만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 곳에서
고작해야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속이 비우니 비 온뒤 하늘처럼 상쾌해졌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기가 겁이 났습니다.
반 아이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쁜 상상은 언제나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엔 민지도 있었습니다.
다시 식판을 가지러 아이들 사이로 걸어왔습니다.
아이들이 모세가 홍해를 건널때처럼 갈라졌습니다.
눈물이 나왔지만 참았습니다.
창피함과 수치심에 눈물이 나왔지만 참았습니다.
식판은 민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민지는 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괜찮아?" 민지가 걱정스레 물었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유가 상했나 봐, 그치?" 민지가 말했습니다.
그만 참고 있던 눈물이 와락 쏟아졌습니다.
하늘은 한 없이 푸르고 바람은 무척이나 상쾌했던 어느 가을날,
식당으로 걸어오는 길, 어깨를 들썩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덩실 덩실 어깨춤이라도 추는듯 말입니다.
'라면에 우유를 말아먹으면 안된다'
국민학교에서 배운 중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름도, 얼굴도, 친구들도...
다른 것은 다 잊어 버렸어도 이것만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틀림없이 상한 우유때문일 것입니다.
민지가 그랬습니다.
"우유가 상했나봐, 그치?"
우아했던 민지는 기억납니다.
이제 중학교때 배운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겁이 납니다.
과연 뭐가 튀어 나올지 무섭습니다.
하지만 질풍노도속의 나를 만나러
한치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절, 그 폭풍속으로 들어갑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