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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지성이란 것이 있는가?

그 녀석들에게는 없는 것이 틀림없다.

by 김현부

친구는 취기와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잠이 들었다. 너무나 황당하고 웃기지만 친구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밤늦게 만나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한 우리는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여기서 힘들다는 말은 시간이 없어 힘들다는 게 아니라 몸이 힘들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늦게 만나서 맥주 한잔 하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세 12시가 넘어가고 자정이 지나면 기다리고 있던 피로와 졸음은 어김없이 밀려왔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라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놈은 일산에서, 다른 한놈은 금호에서 그리고 유일하게 놈이 아닌 나는 수원과 용인이 만나는 어딘가에서 출발한다. 나는 운전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특히 맥주 한잔 할 요량이면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경기 버스 승강장이 있는 신논현역 근처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오후 4시에.


내가 탄 버스는 늦어도 절대 뛰지 않는 나의 성격과 다르게 정확하게 오후 4시에 신논현역 버스 승강장에 도착했다. 일산에서 차를 운전해 오는 친구는 자유로가 막힌다며 좀 늦는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 특별히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는 화려하기만 한 강남역 부근이다. 20대에 참 좋아하던 곳이었는데 지금 강남대로 부근을 훑어보니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부근에 서점이 세 개나 있다는 것이다. 새책을 파는 교보문고, 헌책을 파는 알라딘 중고서점 그리고 예스 24 중고서점이 있다. 새 책을 파는 교보문고도 좋지만 헌책을 파는 중고서점에 가면 한 번도 읽히지 않은 듯한 책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건지는 횡재를 하기도 한다. 사실 그것보다는 이제 '중고'와 '중년'은 나에게는 동의어처럼 느껴져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정겨움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서점에서 중년의 남자가 뜻밖의 횡재를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생각 없는 꼰대 아저씨가 되는 것이 싫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기는 더더욱 싫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어 입과 코를 가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안경에 서리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성가시긴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콧물이 나오긴 했지만 마스크 안에서 흐르는 콧물이라 잠깐 그냥 두기로 했다. 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이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콧물이 코에서 탈출하기 직전이라 마스크 안쪽으로 휴지를 밀어 넣어 코끝에 걸려있던 콧물을 닦아 내었다. 덕분에 안경이 미끄러졌지만 아직 나의 뛰어난 순발력으로 안경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경은 이미 바닥에 떨어졌고 오른손은 마스크 안에 콧물을 닦고 있었고 왼손은 허공을 안경을 잡으려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습을 친구들이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친구들이 오려면 아직 20분 정도가 남았다. 어쩌면 이 바보 같은 모습을 친구들이 봐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한바탕 웃을 일일 테니 말이다. 이 멍청한 모습을 누가 보지 않았을까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떨어진 안경을 주워 다시 썼다.


나의 쇼핑 스타일은 살 것을 먼저 정하고 가서 사는 타입이라 그냥 둘러보다 물건을 사는 일은 거의 없다. 서점도 마찬가지라 이번에도 그냥 둘러보다 책 구경을 마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살 만한 책이 없나?"하고 책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전에 사려다 말은 책 '구운몽'이 생각이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가 이미 사둔 책이라 만약 그때 샀으면 욕만 먹을 뻔했다. 어쨌든 출판한 지 꽤 오래돼 보이는 그 책을 들고 더 최근 것은 없는지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때 친구들이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미련 없이 서점을 떠났다.


서점에서 나와 시계를 보니 4시 20분이 되었다. 일분일초가 아깝다. 그런데 금호에 사는 친구가 마스크가 없다며 마스크를 사야 한다고 때를 썼다. 그래서 약국에 들러 괴상하게 생긴 파란색 마스크를 사서 얼굴을 덮었다. 그 녀석은 이렇게라도 하니 꽤나 안심이 된다는듯한 표정이었다. 약국에서 나와 수제 맥주집을 검색했고 그중에 멀쩡해 보이는 가게를 선택했다. 파란색 마스크를 쓴 친구가 이쪽으로 가면 된다면서 길 앞잡이를 했다. 한참을 걸어가도 가게는 나오지 않았다. 지도를 보니 우리는 목적지와 정확하게 반대편에 서 있었다. 파란색 마스크를 쓴 녀석은 길잡이로는 믿지 못할 녀석이다. 마스크를 입이 아닌 눈에 씌워주고 싶었으나 그럼 그놈 손을 잡고 가야 하기 때문에 대신 썩소를 날려 주었다. 우리는 다시 강남대로로 나왔다. 횡단보도를 보니 보행 신호가 이제 15초가 남아 있었다.


"뛸까?"

"뛰자!"


10초 만에 우리는 강남대로를 주파했다. 서로의 표정을 보니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산악인의 표정과 같이 엄청난 자부심과 성취감이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기도취에 빠져 한 5분을 더 걸어가니 검색했던 가게가 눈 앞에 보였다. 시간은 거의 5시가 다 되었다. 상가 골목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중년의 수다를 시작했다. IPA와 필스너 그리고 감자튀김을 시켜놓고 만나지 못했던 2주 동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언제 해도 질리지 않는 옛날이야기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실 초월했다기보다는 그냥 시공을 왔다 갔다 헤매며 다양한 주제들을 이야기하려 노력하는 애처로운 상태, 한마디로 횡설수설이었다. 워낙 자주 하는 횡설수설이라 웬만한 비약은 우리를 방해하지 못한다. 다 이해가 된다. 예를 들어 저녁에 라면을 먹으면 속이 부대낀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왜 큰아이에게 화를 내었는지로 이어진다. 아마 속이 부대껴서 큰아이에게 화를 내었는지도 모른다. 앞도 없고 뒤도 없으며, 서론도 없고 결론도 없다.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격식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얼마나 격식이 없냐면 친구 중 한 녀석이 취기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것은 바로 이때쯤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6시 48분이었다.


"너 자냐?, 지금, 여기서?"

"10분만"

"진짜?...헐...그래 자라"

"응 10분만"


그렇게 잠든 녀석은 10분만 잔다 해놓고 15분을 자고 일어나 언제 잤냐는 듯 멀쩡하게 수다를 이어갔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두서없는 이야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멍청한 녀석들이 살면서 나름 똑똑해 보이려고 했으니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안쓰럽게 보였고 우리는 서로를 안쓰럽게 보았다. 이렇게 매번 만나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다 보면 그나마 남아있는 나의 지성이 퇴행될 것 같았다. 물론 나에게 지성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놈들한테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각자 서로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 빼고 다 멍청이!'


고민 끝에 우리는 책을 읽기로 했다. 멋있는 말로 하자면 북클럽이지만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책 이야기를 핑계로 또 횡설 수설 하자는 것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시간은 8시 30분. 헤어지기 아쉬워 앞 건물 당구장에 올라갔다. 문을 닫은 곳이었다. 발길을 돌렸다. 큰 마음먹고 강남역 볼링장으로 향했다. 강남역에 있는 볼링장은 클럽인지 볼링장인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대기 진동벨을 받아 들고 우리는 사람들이 노는 풍경을 한참 지켜보았다. 한 10여분 그렇게 서있었다.


"그냥 집에 가자"

"그래"


마치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볼링장을 나왔다. 친구들과 "빠이"를 하고 버스 승강장에 와 버스를 기다렸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북클럽에서 읽을 첫 번째 책은 김훈 작가의 "연필로 쓰기"로 하자고 했다. 한 친구가 "사랑은 연필로 써야 하는데...."라는 문자를 남겼다. 아재라고 욕을 먹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창의성 제로의 문자를 날린 녀석에게는 낮에 그 녀석이 골랐던 촌스럽기 그지없는 파란색 마스크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나의 지성을 위해 또 두 멍청이들을 지성으로 인도하기 위해 "연필로 쓰자"를 읽어야겠다. 나에게 지성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녀석들에게는 없다.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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