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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UP주부 Mar 03. 2021

개취를 존중하는 독서생활

흔한남매는 몇 살까지 좋아하나요


“책 읽어줄게 하나 가져와, 만화책 말고 동화채액!”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가 잠자리로 가져온 책은 ‘흔한남매’다. 일단 엄마가 뜨악할 줄 알고도 가져온 것이기에 내 반응이 터질 때까지는 템포를 조절하며 슬금슬금 다가온다. 꿍꿍이수작에 들뜬 웃음을 참느라 잔뜩 힘준 입술이 제멋대로 씰룩거린다. 심장이 쫄리는 순간을 저혼자 즐기다가 “아 또야~~~” 내 탄식이 터져 나오면 입술만큼 열일 하는 게 눈이다. 눈치를 살피며 내 말투와 표정에서 ‘엄마가 읽어줄지 안 읽어줄지’를 가늠한다. 삶으로 체득한 엄마의 리액션에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감지하면 아이는 춤인 듯 오두방정인 듯 온몸을 사용해 본격적으로 간절함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내가 흔한남매를 읽어주는 게 저렇게나 달뜨는 일일까? 어이없을 만큼 열심인 아이의 구애를 보고 나면 ‘만화 구연’을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불안한 기운이 몰려왔어요. 스스스스~ 파바바박! 으아악!
이쪽으로 온다! 퍽, 쿡! 크악! 이빨괴물 에이미 도와줘~ 빡! 화르르륵~
아, 진짜! 뭐야?! 분노의 핵주먹! 꽥! 냐하!

내레이션은 무뚝뚝 버전으로 쭉쭉 읽으면 되니 그나마 낫다. 으뜸이 말풍선은 남자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뚱뚱한 체격과 깐죽거리는 성격을 반영해 실감나게 읽어야 한다. 오빠 으뜸이에게 놀림을 당할 때마다 괴성으로 맞받아치는 에이미 흉내는 목구멍이 고생이다. 스토리에 따라 엄마, 데이지, 외계인 등 제3, 제4의 인물까지 등장하면 다양성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여백의 미라고는 없이 페이지를 꽉꽉 채우고 있는 온갖 의성어와 의태어를 시의 적절하게 가미하는 것도 신경 써야할 부분이다. 이것저것 구연 스킬을 한껏 끌어올리며 완성도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금방 잠들게 대충 읽고 말아야지’ 속으로 계산 다 해놓고도, 어느새 팍! 꽥! 으악! 성실히도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기보다는 뭐든 모자라다 소리를 듣지 않게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길들여진 내 성격 탓이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구연을 즐기고 있었던 건지도. 아이는 ‘그 장면’을 엄마가 어떻게 재밌게 읽을지, 엄청 웃긴 ‘그 부분’에서 엄마도 빵 터질지, 이런저런 궁금증과 기대에 잔뜩 부풀어있다. 스르륵 잠들기는커녕 엄마랑 같이 키득거릴 순간을 고대하며 눈빛을 반짝인다. 잠자리에서 읽을 용도로는 영 몹쓸 책이 아닐 수 없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 날엔 빨리 아이로부터 벗어나고 싶기만 할 뿐, 흔한남매를 들고 막춤을 춰대는 아이에게 반응할 여력이 없다. 그런 날은 스리슬쩍 위인동화를 읽으면 안 되냐고 떠보기도 하고, 굵은 글씨까지 다 읽으려면 목아프다며 볼멘소리도 늘어놓는다. 그래도 소용없을 땐 “난 이거 재미없어! 엄마도 같이 재밌는 걸 읽어야지!” 윽박질러도 본다. 그러다 감정이 격해져 “빨리 자!” 해버린 날도 있었고, 아무 책이나 골라 별 감흥 없이 읽는 중에 아이가 까무룩 잠든 적도 있었다. 풀죽은 채 모로 누워 잠든 아이를 보며 ‘그냥 읽어줄걸’ 후회했던 날들을 몇 번 겪은 후로는 되도록 아이가 선택한 걸 읽어주게 됐다. 흔한남매를 보며 엄마와 한바탕 웃고 충분히 만족감을 느낀 아이는 그날따라 더 단잠을 잤다. 내 아이를 위한 잠자리에서 읽을 용도로는 이만 한 책이 없는 것이다.




낮 동안 스스로 펼쳐 읽는 유일한 책도 흔한남매, 외출 시 중간 중간의 무료함을 때울 때도 흔한남매, 서점에 들러도 꼭 확인하는 건 흔한남매, 여행갈 때 한 권 챙겨들고 가는 책 역시 흔한남매. 다른 책도 보면서 흔한남매를 보면 모르겠지만, 그것만 보는 것에 불만과 불안이 생긴 나는 아이가 흔한남매를 펼쳐 들면 반사적으로 도끼눈을 치켜뜬다. 다양하게 읽길 바라는 마음에 다른 류의 책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면 선뜻 사주었건만, 그런 건 이렇게까지 끼고 읽지를 않는다. 살 때 제일 돈 아까운 것이 흔한남매인데, 사놓고 제일 돈 안 아까운 것도 흔한남매인 셈이다. 두 번은 읽지 않아서 두고두고 본전 생각나는 책도 많은 세상인데, 이음새가 벌어지도록 누군가에게 읽히고 또 읽히는 책이라니. 책으로 태어나 제 몸값은 충분히 하는구나 싶어 새삼 가치롭게 보이기도 한다.


저 혼자 읽을 때는 인물에 따라 목소리 연기를 해가며 나름의 재미를 취하기도 하고, 어려운 단어나 속담을 어떻게 알았느냐 물으면 그 지식의 출처가 흔한남매인 적도 많았다. 내 수지타산에 비해, 아이는 흔한남매와 함께 자신만의 만족스러운 독서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열 살이 됐으니 그래봤자 얼마나 더 좋아하겠나, 흔한남매 홀릭이 도대체 몇 살까지 가나 어디 한번 두고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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