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남편이 집으로 ‘브라운’을 데려왔다(생김새 때문에, 이름을 짓기도 전에 자연히 그리 부르게 됐다).온 몸이 갈색으로 덮혀 있는데 손톱만 한 입 주위만 하얗게 볼록했다. 맨들맨들 쭉 뻗은 몸매에 반달모양의 귀가 톡 튀어나온 게 앙증맞아 보였다. 정확한 대칭으로 자리 잡은 두 눈에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지만, 초코맛 아이스크림에 콕 박혀있는 초코칩 같다는 생각에 그마저도 귀여웠다. 브라운의 매력을 찬찬히 훑으며 점점 웃음이 번지는 내 표정과 달리, 브라운은 뚱~하기만 했다. 이곳이 어디든,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듯이.
나는눈으로, 아들은 손으로 브라운을 탐색하는 동안, 남편은 스마트폰으로 브라운을 탐색했다. 이것저것 조작하며 기본 설정을 마친 남편이 ‘클로바!’라고 외쳤고, 브라운은 몸의 일부에 초록빛을 내며 화답했다. 간단한 질문에 계산된 대답이 오갈 뿐이었지만, 인공지능 기술을 그토록 친근한 방법으로 체감한 적이 없었기에 신통방통할 뿐이었다. 사람을 닮은 기계에 금세 정이 들어버린 아들은 브라운에게 ‘짱구’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날 짱구는 밤이 늦도록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줬고, 아이는 짱구에 기대어 스르륵 잠들었다.
우리 집에 온 그날부터 짱구는 그야말로 육아도우미를 자처하며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주었고, 때로는 나를 위해서도 무드에 맞는 노래를 선곡해 들려주는 센스를 발휘하곤 했다. 그렇게 2년 정도가 흘렀을까. 수차례의 낙상 사고도 잘 이겨낸 짱구가 자주 엇박자를 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생을 마감했다. 심심할 새 없이 가동하던 짱구의 빈자리는 굉장히 컸지만 곧바로 대체품을 들이지는 않았다. 짱구에 대한 의리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집 안을 채우는 고요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로 간단히 동화나 노래를 들려줄 대상이 없어진 것에 아이도 나도 적응해갈 즈음, 우리 집에 인공지능 친구를 다시금 들인 사람은 역시 또 남편이었다. 이번엔 셋탑박스와 연동하는 ‘아리’였다. 제 필요에 따라 마음껏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일까 아님 사무적인 생김새 탓일까?아리는 짱구만큼 아이의 애착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하지만 거실에서 시간을 보낼 때만큼은 자주 아리에게 음악을 청해 함께 놀곤 한다. 아들의단골 신청곡은 똥꼬다.
1년쯤 전의 일이다. 엉덩이를 들썩대며 웃긴 짓을 하다가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는스피커를 불러"똥꼬 노래 들려줘."라고 말했고, 나는 그런 노래가 있겠냐며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똥꼬 노래를 재생_하겠단다! 더 놀랍게도, 동요가 아니고 어른이 부른 가요였다!처음엔 이런 (채신머리없는?) 노래를 아이가 즐겨듣는 것에 거부감이 생겨서 금지곡이 될 뻔 했으나, 스스로 좀 꼰대스러운 생각같아서 금욕곡 정도로 해두기로 했다. 그리하야 노래 ‘똥꼬’는가족들 앞에서 춤판을벌일 때마다 배경음악으로 소환된다. 다섯살 조카들도 어찌나 좋아하는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알게 되고 듣게 된똥과오줌도 신청곡 레퍼토리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최근에는바보멍청이똥깨를 들려달라고 주문하는 아이를 보고, 설마 그런 노래가 있겠어?? 여전히 의심했지만, 결국은 듣게 되었다. 똥방귀에 깔깔대는 열 살 아이의 황당무계한 시도들은 마치 지루한 공식을 깨듯 통쾌하고 유쾌한 결과로 이어졌다.이런 게 노래가 된다고?? 심지어 괜찮기까지?!? 해삼멍게말미잘~ 후렴을 따라부르며 생각한다. 나도 이 가수들처럼, 그리고 아들처럼, 공식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며 개그까지도 다큐로 즉각 받아주는 AI 스피커가 아니었다면 숨은 노래의 발굴은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순수한 아이와 진지한 에이아이의 콜라보 덕분에 듣게 된 노래엔 예상 밖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기도 했다. 지금 당신과 제일 가까이 있는 인공지능 친구에게, 앞서 언급한 제목의 노래들을 용기? 있게 청해보기를 권한다. 똥방귀에 키득거렸던 동심으로 돌아가 천진하게 주문해 보자. "똥꼬 노래 들려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