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사교육의 시작
열 살이 됨과 동시에 영어 학원에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창 그림 동화책을 보던 시절에도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면 “우리말로!” 라며 분명히 요구하던 아이였다. 1학년 때(=멋모를 때) 학교 방과후 과정으로 원어민영어 수업에 참여했지만 한학기 수강 후 그만뒀었다. 영어에 대한 거부감, 까지는 아니어도 자발적 흥미가 없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스스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줘야지 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떻게 구슬려야 하나 조금씩 조바심이 난 것도 사실이다.
난 뭐 하나 결정하려면 고려해야 할 것이 수두룩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3학년 진급을 앞둔 겨울까지도 아이의 의지에 맞춤한 시기를 가늠하며 학원에 대한 결정을 유보한 채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와 달리 이런 면에서 남편은 참 심플한 사람이다. 더 미루면 적기와 멀어진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집 주변에 보낼 만한 프랜차이즈 학원 몇 개를 서치한 후, 빠른 시일 내에 아이와 상담을 다녀올 것을 제안했다. 당장 올해부터 교과목에 영어가 포함되는 만큼 마냥 미룰 수만은 없다는 것에 나 역시 동의했기에 남편의 추진력에 기꺼이 휩쓸려 학원 상담 예약을 잡아 놓았다.
남은 사안은 아이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다. 간을 보듯 스리슬쩍 영어 학원에 대해 말을 꺼내면 영어를 왜 배워야 하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그동안 다녔던 해외여행을 들먹여가며 여행 가서 친구를 사귀고 싶을 때 말이 통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구구한 설명을 해보지만, 그냥 놀면 되지 뭔 말이 필요하냐는 반문에 도리어 내가 설득당하기 일쑤였다.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인정받기 위한 목적 하나로 학업에 열중하였던 것 같다. 라떼 시절을 떠올리며 ‘공부는 원래 그냥 열심히 하는 거야’라며 일축할 수도 없고, 현실적인 밥벌이 문제라든지 이상적인 꿈 이야기로 열 살 아들과의 대화가 잘 풀릴 리도 없다. 아이에게 공부와 배움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나에게는 꽤 곤란한 일임을 자주 느낀다. ‘동기’라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아무리 퍼준다고 해서 냉큼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할 때를 기다려야 할 것만 같았지만 과연 그런 때가 오기나 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라는 훌륭한 이들의 조언을 적용해야 할 타이밍인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보이지 않는 신념과 눈앞에 보이는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그저 아이의 반응을 열심히 곁눈질할 수밖에.
이 지지부진한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이 사안을 그야말로 ‘아빠 대 아들’답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어느 날 내게 보내온 카톡에 제품 사진 한 장이 첨부됐는데, 바로 큼지막한 박스의 레고가 떠억! 조립한 후 작동까지 할 수 있는 제품인데, 레고매장에 들르게 될 때마다 아이의 물욕을 자극하던 그것이었다.
1년 잘 다니면 내년 어린이날에 레고 마인드스톰 선물로 준다고 해줘.
음. 과연 이 방법이 옳은가. 진지한 사안에 대해 물건으로 아이를 미혹하겠다는 남편의 1차원적 술수가 못마땅해졌다. 학원을 거부하는 아이의 의사는 꽤 의미심장한 것인데, 이렇게 단순히 해결하겠다고? 카톡을 열어둔 채로 아빠의 제안을 전달할 가치가 있을지, 나는 또 습관적으로 곱씹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 핸드폰을 흘깃 보던 아이는 “뭐야?” 라며 반자동적으로 관심을 보였고, 들킨 김에 던져나 보자며 아빠의 제안을 전하기가 무섭게. “그래? 그럼 해야지 뭐.” 라고 답하는 것이다. 딱 1년만 다니는 거라며 약속기한을 못 박는 것 보니 1년은 잘 다니겠구나 싶어 안도가 되는 한편, 고민거리가 해결되어 좋기만 하다기엔 찝찝함이 남았는데 그건 아마도 황망한 기분 탓일 터.
‘이건 모지? 그동안 난 무엇을 위해 그토록 진을 뺐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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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아이는 3학년이 된 첫 달부터 1, 2학년 동생들이 다수 포진돼있는 초등 정규 (쌩)기초반에 들어가 본격적인 잉글리쉬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 하나를 목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