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UP주부 Jan 13. 2022

자신의 위치

'자위'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학교와 학원에 가는 일정을 제외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 아이가 해야 하는 일과는 비교적 단순하다. 샤워, 식사, 온라인 학습, 학교 또는 영어학원 숙제. (이 단순한 일과를 잔소리 없이 알아서 하는 날이 드문 건 왜일까?) 이 일들에 할애된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는 주로 유튜브 영상을 찍거나 TV로 만화를 시청하거나 오디오클립을 듣는 것으로 굵직한 여가시간을 쓴다. (정말이지 단순한 일과에 들어가는 시간의 세 배 이상은 쓰는 것 같다.) 그리고 자투리 여유가 생길 때 아이는 잠깐씩 생각 속에서 논다. 흔한남매의 주인공 으뜸이와 에이미의 말장난, 놀이터에서 친구와 하던 놀이, 온라인 게임 케릭터 등이 소재가 되어 혼자만의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다.      


엄마인 내 입장에서는 그 시간이 그나마 가장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시간으로 보인다.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입당하는 게 아니라 내면에 쌓인 기억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며 노는 모습이 좋게 보인다. 아들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생각의 흐름을 타고 놀다가 어느 시공간과 만나는 순간,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나 접했던 단어 중 궁금한 것을 그야말로 맥락 없이 불쑥 질문하곤 한다. 어느 순간 어느 계기로 아이 안에 남겨진 물음표를 공유할 수 있기에 나는 이 ‘불쑥’을 꽤 환영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날의 불쑥은 그야말로 ‘갑자기 찾아온 손님’처럼 반갑기 전에 당황스러웠다.      




“엄마, 자위가 뭐야?”     


바닥에 널려진 빨랫감을 하나 둘 거두며 다용도실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단어를 곱씹었다. 그동안 아들이 주로 묻던 단어들은 한자어여서 한자의 뜻을 풀어주거나 내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떠올려 설명해주던 습관대로.


‘자위라... 노른자위? 흰자위? 자신의 위치?’     


다용도실로 막 넘어간 순간, ‘아! 그 자위??!!!!’ 깨달아졌다. 마침 아들의 시선으로부터 내 표정이 들통나지 않을 곳에 이르러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담담한 척 “아~ 자위?? 그 단어를 어디에서 들었어?” 하는 것으로 시간을 벌었다. ‘뭐지? 도대체 어디에서 들은 거지?’ 아무리 제한적이라고 해도 아이가 유튜브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반사적으로 쓸데없는 염려가 앞선다. 정신을 가다듬으니 작년에 사두고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책(아홉살 성교육 사전)이 떠올랐다. 잠자리에서 ‘마음 편’을 읽어주는데, 스스로 ‘몸 편’을 읽던 것을 몇 번 봤다. 자위의 출처를 파악했으니 이제는 자위의 실상을 설명하는 일만 남았는데 당췌, 나야말로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다행히 아들이 힌트를 줬다.      


“몸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어~ 우리의 몸은 스킨십을 하면 행복감을 느끼도록 창조되어서 그래~”

“여자도 자위를 해? 엄마도 해봤어?”

“어~ 엄마는.. 잘 안 해봤는데, 여자나 남자나 똑같지~”     


나는 자위의 쾌감을 궁금해한 적이 없다시피 했지만, 단정하면 대화에 선이 그어질까봐 에둘러댄 말이 ‘잘 안 해봤다’였다. ‘안 해봤’지만 그로 인한 쾌감이 있다는 걸 ‘잘’ 알고는 있다는, 쉽게 말해,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이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자위를 ‘잘 안 해봐서’ 자위에 대한 자아개념이 구체적으로 설정돼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뜻밖에도 이 분야에 있어서 나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     




아름다운 몸,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성.

점점 추상적인 설명만 될 것 같은 위협을 느끼며 말을 어떻게 더 이어갈까 주춤하는데 이미 아들은 더 이상의 궁금증은 없다는 듯, 다시 자기만의 세상으로 흘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에 이미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아들은 이미 읽었으므로. 아들에겐 구구절절한 내 설명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걸 엄마도 알고 있는지, 자신이 자위를 묻고 말하는 것이 엄마와의 관계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편안함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아이의 단순함을 나의 복잡함으로 굳이 해석해본 결론은 이렇지만, 정작 아이는 그런 심오한 의도 따위 없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며칠 전에도 책을 보며 야동이 뭐냐고 묻기에 그것도 간신히 넘겼는데, 그때마다 ‘같은 남자인 아빠라면 뭐라고 얘기해줄까?’를 자문하며 내가 만들어낸 대답에 자신을 잃는다. 하지만 아들의 성교육에 엄마의 몫도 분명히 있다고 믿기에 내 몫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진다. 어떤 행위를 했는지 안 했는지 따져 묻는 게 아니라 그 경험으로 인해 파생된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궁금해하는 엄마이고 싶다. 마음가짐은 이토록 고매한데 현실 엄마 노릇을 보면 뭐 뻔하긴 하다. 게임이나 유튜브만 해도 엄마 몰래 ‘했는지 안 했는지’ 늘 신경이 곤두서서 점검부터 하려 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또 다짐한다. 어른인 나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을 할 때가 있으며, 바르게 판단하고 옳은 선택을 하기란 결단코 쉽지 않으니까. 행위 자체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되도록 행위의 이면을 보려고 노력해야지. 특정한 잣대로 바람직한 결론을 내버려 아이에게 답답함을 남긴 채 대화를 마무리 짓지는 말아야지.      


그날을 위해 아이의 모든 이야기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해 둬야겠다. ‘아들의 성’이 갑자기 찾아온 손님 대우를 받지 않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단순의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