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싣고 온 메시지
좀비가 출연하는 재난영화, <부산행>의 성격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이 정도이지 않을까. 하지만 ‘좀비’에 방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좀비는 영화적 용어로 쉽게, 좀비라 표현 됐지만 실은 ‘감염자’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감염이 돼버린 보통의 인간, 감염이 되고도 자신이 그렇게 된 이유를 영원히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인간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러닝 타임 동안 유지해가는 위압감은 분명 있었지만 그것이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 덕분인지 좀비라 불린 것의 기여인지, 적어도 나에게는 불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재난영화’에 초점을 맞춰 이 영화를 다루고 싶다. 쉽게 말하면 이 영화가 관객과 사회에 주려 한 (것으로 보이는) 메시지를 뜯어 보는 것이다. 영화가 언제나 교훈적일 수 없고 그러할 필요도 없지만, 영화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다.
공적 정보가 없을 때 개인의 선택은
<부산행>에서 기차 안의 사람들과 바깥의 사회가 격리되는 순간은 바로, 기차 안에서 뉴스 화면이 재생되던 그 때다. 감염자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고 정부가 이미 행동에까지 나섰지만 기차 안의 사람들은 상황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정부가 발표하고 언론이 전달하는 ‘공적 정보’는 적어도 기차 안에서는, 무의미하다. 승객들은 그저 폭동이 일어났구나, 정부가 군사력을 동원하는구나, 사태가 금방 마무리 되겠구나,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정부와 시스템 그리고 언론을 믿었다.
물론 그것을 믿지 않거나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개미핥기라 조롱당하는 ‘석우’와 천리마고속 상무 ‘용석’이다. 처음 석우는 부하 직원(김 대리)을 통해 ‘사적 정보’를 수집한다. 자본이 제공하는 정보였다. 이때 석우는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에 몰두했다. 기차 안 감염자의 위협을 실감했을 때는 승객 중 자신만이 아는 사람(민 대위)에게 연락을 해 다시 한 번, 사적 정보를 얻는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제공되지 않고 특정 개인에게만 배타적으로 제공되는 정보였다. 이후 석우는 생존을 최우선으로 도모하는, 개인이 됐다. 용석 역시, 본인 회사를 통해 도시가 봉쇄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전의 고상한 겉모습을 버리고 비열한 본능을 드러낸다.
정부와 시스템 그리고 언론을 믿은 사람은 바보 같았으며 믿지 않고 제 살길을 찾아 나선 석우는 잔혹했다고,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권위와 보편성을 갖춘 공적 정보가 없다면 개인의 선택은 대체로 한 곳에 수렴하기 마련이다. 각자도생이다. 안전하게, 건강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너도 나도, 우리 다 같이 살 방법을 찾자’는 목소리는 존재하기 어렵거나 존재 하더라도 쉽게 그 힘을 잃고 만다.
<부산행>을 보며 메르스를 떠올렸다. 영화 속 인물들이 재난이 벌어지자 급격히 혼돈에 빠졌듯 메르스를 겪던 한국 사회도 그와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었다. 메르스 환자가 처음 생겨나고 이후 감염자 발생 속도는 더 빨라지는데, 정부는 감염 원인과 경로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그저 안심하라 일렀다. 일부 시민들이 스스로, 메르스 환자가 발생하거나 경유한 의료기관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괴담’을 전파했다. 그렇게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공적 정보는 제 역할을 못했음이 드러났다.
공적 책임이 없을 때 사회의 미래는
이 영화가 엔딩 크레딧을 올렸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메르스 후유증을 앓고 있다. 메르스에 감염 되고도 늑장 신고 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마침내는 해임된, 대구 공무원 김 씨의 사례(<한겨레> 2016년 7월12일치)가 있다. 그는 정부가 의료기관 명단을 늦게 공개해서, 잠복기를 잘못 알려서 신고하지 못했을 뿐이다. 김 씨는 자신의 생계를 잃는 것으로써 메르스 발생의 책임을 오롯이 떠안았다. 메르스 유행 때 자리에 있던 장관 누구도 책임을 진다며 스스로 물러난 일이 없다. 해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진행 중인 김 씨는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감염된 게 (저의) 죄인가요?”
공적 책임은 정확한 공적 정보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주체들의 몫이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또 운용하는 사람들이다.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재난이 발생하거나 극복된 뒤에도 이 공적 책임은 필수적이다. 시민들 사이에 움트는 공존공생의 의지를 한 데 모으는 힘이며, 앞으로 사회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부산행>의 기차 안에서 재난을 극복해 가는 주체는 석우, 상화, 영국(고교 야구부)이다. 이들이 쥔 수단은 맨 주먹과 야구 방망이, 기껏해야 스마트폰이다.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는데도 고작 물리력을 조금 더 가진 개인이 원시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상황만 보인다니. 이 장면이 영화적으로는 ‘쾌감’을 줄 지 모른다. 저 셋이 감염자들을 때려 잡으면 마치 관객인 내가 악을 물리친 것 같은, 그러한 쾌감.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적어도 중심인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 상상하면 어떠한가. 현실이라면 관객인 우리들은 저 셋과 같은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닐 수 있으며 당연히 저들이 구해주는 딸, 아내, 여자 친구일 거라 장담할 수도 없다. 오히려 부지불식간에 감염자가 됐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것이 우리가 공적 책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할 이유일 터.
<부산행>은 ‘성경’과 ‘수안’이 손을 잡은 채 생존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들이 겪게 될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공적 정보와 공적 책임은 존재하거나 작동할까. 메르스 그 후 1년인 현재, 영화가 끝난 뒤의 ‘부산’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