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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Aug 09. 2016

[영화] 걸어도 걸어도_'고 감독'의 영화를 읽는 법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환상의 빛>.


그의 별명은 ‘고 감독’, 한국 팬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다. 그의 첫 영화 <환상의 빛>(1995)과 <걸어도 걸어도>(2008)(이하 <걸어도>)가 재개봉한 데 이어 새 작품 <태풍이 지나가고>(2016)(이하 <태풍>)가 얼마 전 개봉했다. 고 감독은 <태풍>을 끝으로 한 동안 가족 영화는 만들지 않겠노라 말했다. 팬들의 아쉬움이 큰 만큼 최근의 연이은 개봉은 더욱 반갑다.


이번 영화평은 일종의 ‘고 감독 입문서’다. 아직 고 감독의 작품을 접해 보지 못했다면, 한 두 작품을 본 뒤 흥미가 생겨 다른 작품을 찾아 보는 중이라면 이 글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들이 가진 공통분모를 이렇게 정리해 봤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가족, 가족 중 한 사람의 부재(죽음)와 그에 따라 가족에게 남는 영향, 잔잔하게 전해지는 일상들까지.




가족의 형태가 다양하다


고 감독의 작품에는 언제나 가족이 등장한다. 다만 무언가 다른 형태의 가족이다. <아무도 모른다>(2005)에는 한 어머니가 여러 남자들에게서 얻은 어린 자녀들이, 어머니의 ‘가출’ 이후 최소한의 생계 수준도 보장 받지 못한 채 생존해 가는 모습이 나온다. 지난해 말 개봉한 <바닷마을 다이어리>(2005)(이하 <바다마을>)의 가족은, 아버지가 세 번의 결혼 중 얻은 딸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 집에서 사는 형태다. 한국 드라마였다면 아마 ‘막장’ 딱지를 얻고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을 테지만, 그의 영화는 달랐다. 카메라는 차분하게 인물들을 비출 뿐이다. 죄인이나 악인을 규정해 ‘가정 파탄’의 책임을 오롯이 그 사람에게 떠안기거나 ‘정상 가족’의 틀에 인물들을 끼워 맞추려 하지 않는다. (물론 몇몇 인물이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견지하지만 그것이 감독이 전하려는 핵심은 아니다.) 그러한 방식은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물들, 그들의 생에 대한 의지를 더 돋보이게 한다. 한 마디로 그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답’을 강요하기보다 자신의 영화 속에서 관객들이 옳고 그름, 좋고 싫음 등 다양한 판단과 감정을 겪어 보게 이끈다. 그 과정 자체가 관객들에게는 ‘현실적인 위로’가 돼왔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 눈물겹고 때로는 화도 나는 장면들의 연속이지만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의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메시지를 남긴


가족의 형태가 다양한 가장 큰 배경은 ‘구성원의 부재’가 아닐까. 그리고 그 부재는 대체로 ‘죽음’에 의한 것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죽고, 남은 가족들은 죽은 자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이 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남은 자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 등이다. <태풍>에서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 ‘료타’는 자신에게 남은 아버지의 흔적들을 인지해 간다. 그 과정에서 료타는 다시, 자신의 아들 ‘싱고’에게 경험과 가치관 등의 흔적을 남긴다. <걸어도>는 가족이 한 데 모이는 계기로 장남의 죽음을 설정한 것에서부터 이미 죽은 사람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장남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상실을 줬지만, ‘나비’라는 매개를 통해 가족들이 오히려 어떠한 상실을 극복하거나 세대가 기억을 공유하게 이끌기도 한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는 이혼 후 아들 싱고를 가끔 볼 뿐이지만 그때마다 싱고는 '료타 식 삶의 방식'을 닮아 간다.
<걸어도 걸어도>의 두 모자(母子)가 장남의 묘에 다녀온 날, '나비'가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나비'는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매개가 된다.


• 작은 일상이 모여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만든다


고 감독의 카메라는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 비교적 오래 시선을 둔다. 밥을 짓거나 먹는, 집 주변을 걷는, 이부자리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서 인물들은 대화하고 또 자신의 생각이나 습관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들이 보여준 작은 일상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 일상들이 쌓여 영화의 현재, 인물들이 만들어 갈 앞날이 결정됐음을. 이를 테면 마당에서 키운 매실에 이쑤시개로 콕콕 자신의 이름을 박아 넣는 어릴 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으로 <바닷마을>의 딸들은 더 가까운 가족이 돼간다. <걸어도>에서는 ‘아츠시’를 비롯한 세 아이들이 햇살 아래 꽃을 잡으며 뛰노는 장면, ‘유카리’와 아츠시가 이불에 누운 채 ‘누군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익살스럽게 떠드는 장면 등이 영화의 방향을 짐작케 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한 장면. 자세히 보면 매실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 감독은 최근 <태풍>을 발표한 뒤 말했다. 그 영화에는 50대를 지나는 자신의 고민이 짙게 담겨 있노라고. (그래서인지 포스터의 문구는 ‘지금 당신은 당신이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다.) 60대에 접어들 무렵 아마도 나올 그의 새 영화 역시 자신이 지금껏 사는 동안 지녀온 어떤 물음을 관객과 나누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가족, 부재 그리고 일상’이라는 기존의 키워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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