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를 왜 알아야 하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애잔함.
‘지난 20년간 한국 멜로는 결국 허진호였다.’ 평론가 이동진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이하 <8월>)를 그렇게 평했다. <봄날은 간다>(2001)(이하 <봄날>)에 대한 그의 평가에도 감독 이름 ‘허진호’는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허진호 감독은 멜로 영화라는 틀을 빌려 인물의 감정을 훌륭히 표현해 냈고, 관객들은 그의 영화를 보며 ‘공감’했다. 허 감독이 이번에는 독특하게도, 역사극 <덕혜옹주>를 선보였다.
앞선 세 영화는 일정한 틀을 갖는다. 개인이 어찌 손 써볼 수 없는 상황을 설정한 뒤, 그 안에서 인물들이 전하는 감정적 애잔함에 집중하는 것. <8월>은 정원의 예고된 죽음 앞에서 정원과 다림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봄날>의 상우와 은수는 서로의 이미 떠나 버린 마음에 좌절한다. <덕혜옹주> 역시 개인의 무력함을 더 짙게 드러내는 시대적 한계가 두드러져 관객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인물들 사이에 ‘시대’가 있다.
‘장한’을 연기한 배우 박해일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손)예진씨와 저 사이에는 시대라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아요.” 소재나 배경으로서 ‘시대’가 해 낸 역할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이때의 시대는 우리가 이미 알듯, 부자유와 억압이 개인의 작은 선택은 물론 인생을 옥죄던 일제. 이 영화에서 덕혜와 장한, 둘의 감정이나 행동은 모두 시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둘의 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다만 시대적 배경이 영화에서 갖는 일종의 아우라가 너무 두드러져, 인물 그 자체가 갖는 요소(성격 등)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과거의 한 순간 또는 한 인물을 다룬 다른 영화보다는 물론 섬세한 감정표현이 많았지만, 허 감독의 이전 영화와 비교한다면 말이다.
역사는 ‘덕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덕혜라는 인물은 영화라는 장르가 다루기에는 사실 까다롭다. 역사책에서 누구나 한번은 접해봤을 법한, 영웅적 성과를 낸 것이 아닌 데다 관련 기록물도 적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해 10월 대마도를 여행했다. 그때 한국인 가이드는, 젊은 후배 가이드들이 대마도에서 일하고 싶어 하면서도 덕혜를 모르는 것을 성토했다. “여기 여행 온 분들은 대마도에 오신 만큼 덕혜를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솔직히 그 때의 내 심정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왜 알아야 하지?’
지금의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쩌면, 인물의 이력이라기보다 그 인물이 아무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던 ‘이유’가 아닐까. 덕혜의 삶은 그 자체로 일제의 강압과 그에 따른 아픈 역사를 상징한다. 그래서 외려 영화를 통해 인물을 들여다보는 동안 느끼는 답답함 또는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버거울 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 두는 것은 최소한의 가능성이다. 나와 우리가 평화 자유 안전과 같은 묵직한 삶의 가치를 일상에서 이어갈 수 있는. 덕혜라는 인물을 처음으로 영화에서 다룬 이번 영화가 의미를 갖는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