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9개 부문 수상.’ 이 설명만으로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찾아 본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여느 범작(凡作)들과는 다르다. 웅장한 스케일, 눈을 사로잡는 배우의 연기, 사랑을 이야기하는 메시지까지 어느 하나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환상과 감성을 조금만 걷어내고 이 영화를 보면 ‘어색한 지점’들이 드러난다. 모두가 좋아하는 이 영화, 나만 삐딱하게!
왜 사랑에 빠진 걸까?
불꽃 튀는 그 순간…. 불꽃은 영원할까? (스틸컷)
‘알마시’와 ‘캐서린’은 사랑에 빠진다. ‘한나’와 ‘킵’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로맨스가 영화의 핵심 축이 된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세심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알마시는 어느 순간 캐서린을 따라다니고 있었으며 그런 알마시를 캐서린은 무슨 이유에선지 은근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물론 서로 다르기 때문에 느끼는 호기심과 끌림이 컸을 수는 있다. 둘은 각각 수식어 하나 없이 긴 글을 쓰는 (건조한) 사람, 사랑의 종류를 이리저리 구분해내는 (섬세한) 사람으로 표현되니까. 하지만 내 해석이 그럴 뿐, 감독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뚜렷한 이유를 내놓지 않았다.
한나와 킵에게는 그나마 피아노와 폭탄이라는, 눈에 보이는 매개가 있었다. 폭탄을 제거하는 남자 군인과 피아노를 치다 남편을 만날 거라는 말을 들어온 여자 간호사의 만남…. 위험에 빠진 상대를 안전하게 보호해내는 이 같은 순간은 어느 작품에서든 사랑의 결정적 계기가 돼왔다. 그러나 영화가 알마시의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상대적으로 한나와 킵의 감정 전개는 자세히 다루지 못했다. '교회 안 밧줄 장면'이 뜬금없는 등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하늘을 나는 경험을 선사하다니, 눈은 호강하는데 입은 "응? 갑자기 왜?"를 읊조리는.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스틸컷)
이쯤 읽으면 반문할지 모르겠다. “사랑에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빠져드는 거지.” “사랑에 빠진 이유를 관객들이 저마다 다르게 상상하면 오히려 재미있지.” 일리 있다. 다만 현실이 아닌 영화에서라면 감독이 더 ‘친절’해도 좋다고 본다.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과 배우가 해석한 사랑이 어우러진 결과물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면 관객들은 영화를 따라가기 한결 수월하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배경, 목숨이 오가는 막다른 상황 등으로 로맨스의 틈을 슬쩍 메우려한 듯 보여, 친절하지는 못했다.
왜 이 영화에 등장한 걸까?
캐서린의 남편 ‘제프리’와 캐나다 출신 ‘카라바지오’, 두 역할에 주목해보자. 먼저 제프리, 이 역할을 상상으로 한번 지워보자. 캐서린에게 남편은 있지만 그 실물이 등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캐서린은 지도 제작자들에게 남편이 있다고만 하고, 캐서린이 알마시와 밀회를 즐기는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보는 제프리 대신 어느 남성의 뒷모습만 비춘다. 후반부 비행기 추락 때도 제프리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게 한다. (어차피 실제 영화에서도 알마시가 캐서린을 구하는 장면만 클로즈업 된다.) 이렇게 해도 영화의 전개가 크게 흐트러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등장했기 때문에 되레 시선은 분산됐고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이 불륜이냐 아니냐 하는 도덕적 판단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내가 다른 남자의 공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니, 그의 생각이 이 영화의 전개에서 그리 중요한 것일까. (스틸컷)
카라바지오는 등장부터 작위적이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난, 이국만리의 고향 친구라니. 그가 그렇게 한나와 알마시 곁에 흘러들 수밖에 없던 이유가 후반부에 나오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감독의 관심사는 아니었던 듯싶다. 그는 알마시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나라는 매개를 통해 존재하는, 딱 그 정도였다. 영화 전개상 필요는 한 역할인데 냉정히 말하면 그저 주변 인물을 위해 소모됐을 뿐이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국적(종교)과 처지의 인물들이 나온다. 사랑과 우정 등으로 얽힌 관계도 복잡하다.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해도 많고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는 차원에서, 특정 인물은 과감히 소거하거나 역할의 등장 개연성을 더 높여줬다면 만족스러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