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게 돌아보는 올 한 해, 2016년.
크리스마스에 볼 만한 영화로 <사울의 아들>을 정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그럴 수 있겠다’와는 멀었다. 당황하거나 신기해하거나, (후하게 봐서) 약간의 기대를 전할 뿐이었다. 크리스마스의 연관 검색어쯤 되는 것들, 이를 테면 환희 축복 사랑과는 거리가 먼 영화로 보이니까.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가
진리에 순종하라, 내가 졸업한 학교의 정문 탑에는 이 글귀가 라틴어로 쓰여 있다. 그 바로 앞에는 매 연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구유가 설치된다. 구유에는 그 해의 기억할 만한 사건 이슈 또는 역사가 그려진다. 2014년의 세월호, 2015년의 난민이 그 예다. 올해는 세월호, 위안부 소녀상, 청년 실업 등이 함께 담겼다.
구유 앞에 서면 늘 그렇다. 또 한 해가 갔다며 씁쓸해하다가도, ‘지옥’ 같은 한 해를 보냈지만 더 지옥 같은 다음 해를 맞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해야 할 진리라는 게 어렵고 거창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닿는다. 최소한의 공감과 연대, 바로 한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생존의 진리’다.
순종하지 않는 자, 사울의 일생
성경에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불순종의 대명사다. ‘다 쓸어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좋은 짐승과 가축을 챙겨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 이 배경지식을 알고 <사울의 아들>을 보면, 왜 제목이 그런지 이해하게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원치않게 시체(토막)를 치우고 태우는 유대인 사울은, 독일군의 지시를 어기고 한 소년의 시체를 장례 치러주려 한다.
왕 되신 주여 찬송하나이다
땅에서 음식이 나게 하시며
죽음의 천사께서 랍비님 기도를 들으시네
시체를 땅에 묻을 때 기도를 해 줄 랍비를 찾아 수용소를 떠돌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수차례다. 죽은 사람 하나 때문에 산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다며 다른 유대인들이 자신의 행동을 비난해도 사울은 꿋꿋하며 떳떳하다. 그는 소년을 아들이라 칭하지만 영화 밖에서 일부 사람들은 소년이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 같은 해석이 타당해 보이는 이유는, 소년이 아들인지 여부가 사울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들이건 아니건 사울이 생명의 존엄, 생존의 욕망이라는 가치를 지키려던 것이 중요하다. 사울에게 순종할 유일한 대상은 그 가치였을 뿐이다.
차분하게 마무리해보는 올 한 해, 2016년
종교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탓인지, 나는 사실 크리스마스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일 년을 장식하는 수많은 휴일 중 하나라 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다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축제 분위기와는 한 뼘 떨어져, 이 영화를 돌려봐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거라 생각한다. 올 초 개봉한 ‘작품성 있는’ 영화지만 상영관이 많지 않아 바쁜 누군가는 놓치고 말았을 이 영화,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떤 가치를 마음과 머리에 새기며 살아야 할지 알려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