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모두를 관장하는 정령 ‘시시신’이 숨을 한번 불자, 그를 향하던 총기 위로 싹과 꽃이 돋아난다. 영화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가 다루는 핵심 가치가 ‘생명력’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은 쉽게 죽지도, 죽으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생명의 살려는 의지가 다른 생명의 그것과 조화를 이루기까지는, 너무 큰 희생이 필요했다.
시시신(의 체액)을 피해 물에 몸을 숨긴 사람이 말한다. “마을이 공격 받으면 저 철들은 다 어째?” 철을 만들어 온 여자가 그 옆에서 답한다.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돼!” 일단 살아남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말은 언제 들어도 명쾌하다.
에보시와 마을 여자들. 강인하며 활기차다. <원령공주> 스틸컷
영화 전반에서 타타라 마을의 사람들은 참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는, 생명력의 전형이다. 남자들이 ‘에보시’와 함께 무기를 들어 마을을 지키고 여자들은 철을, 나병 환자는 무기를 제조한다. 이 마을에서는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마을에서 모두가 제 역할과 소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함께 가자’는 배려 덕분이다. 무기력하고 싶지 않으며 무책임하기는 더 싫지만 그렇게 되도록 사람을 내모는 사회에서 흔히 들리는 말은 ‘각자도생’인 것을 보면 말이다.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생명력은 짐승을 비롯한 자연에는 강력한 위협이 됐다. 인간이 철을 얻으려 산을 헤치면 짐승은 터전을 잃었으니까. 인간과 짐승, 어느 쪽도 자신의 생존 문제에 있어서는 쉽게 양보와 타협을 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싸움을 인간과 짐승 중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알기 어려울 만큼 공격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린다.
자연의 증오와 한이 물론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됐겠지만 ‘공격→증오→복수→공격…’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멧돼지, 원숭이 등 짐승들도 최소한의 역할은 했어야 했다. 무리마다 산(숲)을 하나씩 차지한 채 ‘영역 다툼’을 할 여력이 있었다면….
"살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아요!" 인간과 짐승,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아시타카. <원령공주> 스틸컷
살려고 하는 의지는 그 자체로 가치 있지만, ‘각자 자신의 생명과 안위만을 챙기는 것’은 결국 화를 부른다. ‘나는 살고 싶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너도 살고 싶을 것이다’는 전제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너도 나도 살아남을 수 있다. ‘아시타카’가 내도록 강조했지만 다른 생명체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인정한, 바로 그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