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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Oct 13. 2016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_좋았다고?

공감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 시절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하 그 시절)는 전형적인 ‘추억 소환 콘텐츠’다. 20대, 30대 관객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감성에 흠뻑 빠져보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받았는지 대만에서는 올 초 <나의 소녀시대>라는 영화 역시 개봉했고, 큰 인기를 얻었다. 이들 콘텐츠에서 인물들은 학교와 가정을 중심 배경으로 해 사랑과 우정, 때로는 일탈까지도 경험한다. 그 시대를 살았다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상황들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와 거의 비슷한 플롯의 <나의 소녀시대>. 스틸컷.

이때 서사에 깔린 기본 전제는 ‘그땐 그랬지’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정서는 ‘힘들고 상처 받고 부끄러워도 그때가 좋았다, 순수했다’다. 과거가 곧장 ‘아련함’으로 포장되는 순간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스물>이 과거를 다루는 방식이 딱 그랬다. 재현된 과거→아름다웠던 그 때. 그다지 어렵지 않은, 한 마디로 말하면 게으른 연출이었다.

'찌질했던 그 시절이여, 돌아가고 싶구나.' 이러고 끝나버렸다. 이 영화는. <스물> 스틸컷.

나는 이 같은 연출이 늘 불편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올 것이다. 내 기억 속 중‧고등 학창시절은 그다지 아름다울 게 없다. 특히 다니던 고등학교는 성적순으로 기숙사 열람실의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하거나 아예 시험 때마다 등수를 매겨 복도 벽에 공지했다.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지만 그렇다고 학교생활이 즐거울 수는 없었다. (단 하나도.) 경쟁에 쫓기니 친구랑 어울리는 일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경쟁에 폭발해서 하루는, 학교 가는 척 집을 나섰다가 몰래 도피를 했다. 물론 하루 만에 부모님께 들켜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이렇게 구구절절 적고 보니,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인간만 되는 듯해 괜히 조심스럽기도 하다. 다만 나는 힘들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되, 경쟁이나 불합리 같은 외부의 구조적 요인을 계속 문제 삼기로 했다. 일상에서. 추억 소환 콘텐츠를 볼 때도 창작자의 의도를 존중은 하되 미화된 과거는 없는지 따져보는 습관이 있다. (“저게 웃겨?”는 내 단골 멘트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스틸컷.

<그 시절>에서 대표 삼아 한 장면을 짚고 싶다. 교사가 영어 교과서를 안 가져온 학생에게 사정을 묻지도 않고 두 번씩 벌을 주는 장면이다. 영화가 다음 전개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장면일 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나도 저런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 덕분에 더 잘 됐다’고 한다면 안타까울 것 같다. 이런 콘텐츠를 본 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만 하면 사실 더 나은 현실이나 미래는 오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앞서의 장면과는 다르게 유의미한 장면도 있었다. 교관이 학생들을 도둑으로 모는 것에 주인공들이 저항하는 장면, 이것 덕분에 나는 결과적으로는 이 영화를 게으르지 않은 영화로 봤다. 저항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공감은 불러오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영화 밖의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추억 소환 콘텐츠는 과거의 사건을 단순 복제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연출자가 생각하는,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할 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 시절>은 그래서 어땠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과거를 다뤘지만 마냥 과거에만 머무르는, 게으른 영화는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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