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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an 11. 2020

참 별난 타인

사고 현장으로 취재를 갔던 날

* 2017년 5월 지방주재 기자로 근무할 때의 일을 쓴 것입니다.


오후 3시쯤이었나. 그날 쓰던 기사 중 슬슬 마무리할 건 하고 다음날 기사 발제를 하는 시간. 연합뉴스 속보 알림이 떴다. 우리 쪽 서울 데스크의 전화도 울렸다. 부산 데스크의 전화도 뒤따라왔다. 진동과 진동이 원래부터 연결된 소리였던 마냥 연달았다.

      

거제 조선소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고 사람이 죽거나 다친 것 같았다.     


근처에 있던 내 동기 강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보고 가란다.” 우린 거제로 가려고 만났다. 그때 나한텐 소형차가 한 대 있었다. 내가 운전했고 옆 자리에 앉은 강 기자는 이 데스크, 저 선배, 거제에서 만나기로 한 부산의 다른 동기와 연락을 계속 주고받고 있었다.      


장례식장까지 들어가야 되나? 유족들 만나면 인터뷰해야 되나? 멘트가 있긴 있어야 하지 않나? 기레기 소리 듣는 거 아닌가? 안 쫓겨나면 다행이겠는데? 일단 사태 파악도 가서 좀 더 해봐야하지 않을까? 그래 일단 가야겠지?     


여기까지 적는 동안 ‘내가 어땠다’는 ‘느낌’이 표현되지 않은 걸 눈치 챘을까?     


정신이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사태 파악이 안됐다. 사고가 났으니 기자가 현장에 가고 가서 취재를 한다, 이 로직이 날 움직이는 거라고 봐야 했는데 그건 이 상황이 내게 ‘처음’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었다.      


너무 익숙할 때 감정을 잘 못 알아채는 것처럼 너무 처음이어도 비슷한 것 같다.      


거제의 한 병원에 도착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장례식장 입구의 모니터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였다. 어떤 느낌들이 생겼다. 사람이 죽은 걸 실감하는 내 마음은 자꾸 힘이 풀리려 했고 취재라는 역할을 다해야 하는 내 머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슬펐고 막막했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당시 난 시민사회단체를 맡고 있었기에, 금속노조에서 알고 지내던 취재원에게 연락해 관련 멘트 한 줄 줄 수 있는 분의 연락처를 받았다. 그 분과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병원과 장례식장 주변을 살폈다. 경찰을 출입하던 강 기자는 아는 경찰들과 연락해 정확한 사고 경위를 파악했다.      


그날 세상을 떠난 노동자들 대부분은 거제에 일하러 혼자 와서 부모님, 아내,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고는 급작스러웠고 아직 병원에 도착하지 않은 유가족들이 많았다. 가족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심정을 감히 가늠해봤다. 깊이, 오래 가늠하고 있지는 못했다. 기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다시 움직였다.     




지하 1층이었다. 수습된 시신이 모셔져 있는, 그래서 병원 관계자는 기자들의 출입을 막았던 곳. 들어가지 말라고는 했지만 막아서고 있는 사람은 없는 그 틈에 나 혼자 거길 내려갔다. (나중에 다른 언론사 기자 한 명도 내려오긴 했다.) 복도 끝 먼 '그 방'에서 누군가의 끊어질 듯한 울음이 들려왔고,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뭔가 있을지 모른다며 주변을 보는데 경찰인지 병원 관계자인지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잠시 숨었다 나왔다.      


조마조마해 하며 복도를 서성이다 눈에 띈 검은 봉지들.  유류품이 담겨 있었다. 그냥 봉지에 그냥 담긴 유류품들의 그 모습이 그 순간의 내게 '이상'했다. 만약 유가족이 유류품이 이렇게 있는 걸 보면 어떤 느낌일까, 그 생각에 닿자 기사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http://bit.ly/2TbGGTB


단독 기사였다. 포털 메인에 걸렸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조심스러운 지점도 있다. 가지 말라는 데를 가서 쓴 기사가 자랑스럽냐고, 누군가 내게 물을 수 있고 내가 내게 다시 물을 수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곳으로 내려가기까지 그 누구의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는 것, 복도 끝 ‘그 방’ 근처로는 가지 않는 것으로써 무리하지 않기 위한 나름의 최대 노력을 했다는 것.


그날 취재를 마치고 선배, 동기들과 아주 늦은 저녁을 먹는 자리. 밥술을 뜨면서도 난 내가 쓴 기사가 쭉 높은 조회 수와 댓글 수를 기록하는 걸 지켜봤다. 몰래몰래. 신기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처음 간 굵직한 취재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에 대한 직업적 보람이었다.      




근처 모텔에서 자고 다음날 같은 곳으로 다시 취재를 갔다. 전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빈소가 마련됐다는 것, 관계 기관들의 브리핑이 이어졌다는 것을 꼽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많이 울었다는 것도.      


가족을 잃은 사람을 눈앞에서 보는 타인의 위치란 건 처음이었다.      


타인 중에서도 참 별난 타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사람과도, 그 사람의 가족과도 인연이 없지만 인연이 있는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타인. 가까이에서 지켜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타인.      


“니 울었나?” 사진기자 선배가 묻는데 들키면 안 될 걸 들킨 듯이 그렇다고 했다. 선배는, 나도 그랬다고 했다. 지금도 안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지금도 이런 데 오면 눈물은 나는데 눈물이 부끄럽지는 않다고 했다. 기자가 객관적인 자세로 취재하고 기사 써야지, 그런 거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눈물 날 상황 보고 눈물 안 흘리는 기자가 쓰는 기사가 의미가 있겠냐고.      


선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눈물이 나다가도 또 금방 닦아내게 되더라. 울고 있자고 이런 데 오는 건 아니니까. 내가 왜 눈물이 났는지를 여기에 없는 다른 사람도 알면 좋으니까.     


더 이상 기자가 아닌 요즘도 가끔 저 때의 기사를 들춰본다.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하지만 티는 못 내고 혼자 새로고침 해보던 기사. 안타까운 사건사고 현장을 소재로 했는데 조회 수, 댓글 수가 많다고 뭔가 ‘희열’ 같은 걸 느끼면 잘못 같았던 기사. 바꿔 생각하면 꼭 그럴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함께 슬퍼했으니 오히려 그 기사는 ‘있어서 다행인’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데.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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