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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Aug 22. 2020

헬싱키에서의 첫 날

여행보다 좋았던 일상을 뒤로 하고 온 여행에서

헬싱키의 첫 숙소는 한국으로 치면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이었다. 여러 명이 함께 방이나 부엌을 쓴다는 점에서. 헬싱키 중앙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이지만 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속소 '호스텔 다이아나 파크' 앞. (한참을 걸린 이유 https://brunch.co.kr/@audskd26/42) 1층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나는 '무려' 6층의 계단을 엘리베이터 없이, 케리어와 함께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1층 입구부터 느껴지는 '고상함'이 더 놀라웠다. 그리고 안심이 되었다.


리셉션에 도착해 이런저런 정보를 말하니 이미 내 방이 계산 되어 있다고 한다. 이번 핀란드 여행에서 사전에 비용을 지불해놓은 숙소와 현장에서 결제해야 할 숙소를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 숙소는 후자에 속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괜히) 그런가보다 하며 방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헬싱키보다 더 북쪽의 로바니에미를 목적지로 다시 공항으로 가야 했기에 완전한 '풀어헤침'은 아니었지만. 헬싱키 거리를 더 걷고 싶어서 밖을 나왔다. 많이 피곤했는데도 몸이 움직여졌다. 역시, 몸보다는 마음이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건.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이라기보다는 대형마트와 편의점 사이의 어딘가로 보였다. 요거트, 우유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고 맥주는 3유로쯤 했다. 샐러드를 담아 g수에 따라 가격을 매길 수 있었다. 이것저것 구경하다 커피우유 같은 걸 하나 샀다. 내일 아침에 한국에서 가져온 빵과 같이 먹어야겠다며. 유로가 익숙하지 않아 계산대에서 어떤 걸 내밀지 모를 때 직원이 친절하게도, 유창한 영어로, 알려준 게 기억난다. 어떤 도시의 좋은 느낌이라는 것은 사소해보이는 순간에서 보통의 사람에 의해 결정되고는 했다.


무작정 걸었지만 정처없었다기에는 걸음이 분명했다. 지나는 많은 것에 생글생글한 마음을 주면서 걸었다. 추워서 마리메꼬 매장과 스톡만 백화점에 잠시 들어가 몸을 녹이기도 했다. 몸만 녹였다. 보는 것으로부터 오는 영감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워졌을 때 다시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에 도착했더니 침대 위에 메모가 하나 있었다. 리셉션을 지키던 분이 쓴 것이었는데, 이름이 헷갈렸다고, 숙소 비용을 나는 여기서 결제해야 하는 게 맞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리셉션으로 가서 결제를 했다. 그 분이 나의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물었고 나는 있는 그대로 답했다. 로바니에미, 사리셀카 일대를 거쳐 다시 헬싱키로 올 거라고. 그는 헬싱키로 오면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자신이 도와줄 테니 연락하라며 왓츠앱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고마웠다. 호의의 깊이를 의심하자면 충분히 하고도 남지만, 그 순간은 그저 고맙기로만 했다. 마음을 마음으로만 받는 일,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게 여행이니까. 헬싱키로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굳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고, 혼자서 보낼 시간이 충분했기에.


다음날 이른 아침 일어나 혼자 주방 테이블에서 빵과 커피 우유를 먹고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전날보다는 조금 능숙하게 길을 찾고 역에 도착했다. 여행지에서는 그렇다. 두 번만 봐도 이미 반가운 걸 너머 일상처럼 다가온다. 아침 일찍 역 안의 가게에서 따뜻한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을 보며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은 여전히 깔끔했고 조용했다. 공항에 비행 출발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과일 주스 같은 걸 마시며,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올렸다.


로바니에미 공항 도착 직전의 하늘, 땅.

이직이 결정됐다. 출근까지 남은 3주 중 2주를 핀란드에서 보내기로 했다. 가보고 싶던 '겨울 나라'를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면 더 좋을 것 같아서였고, 만족스럽다. 낮 3시면 깜깜해지는 이곳의 겨울. 그 특유의 gloomy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별명이 #비구니입니다만


티켓팅 전에 조금 고민은 했다. 다른 나라를 갈까라기보다는 여행을 갈까말까라는. 퇴사 후 11월 한 달과 12월의 며칠이 난 참 행복했는데, 그건 정돈되고 담백한 일상 덕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재료들로 차려 먹은 끼니, 1시간 넘는 거리지만 씩씩하게 걸어서 다니던 구립도서관, 읽고 싶었던 책을 그 어떤 방해 없이 푹 빠져 읽던 날들, 책에서 마음에 닿는 구절을 만나 잠시 멈추어 있던 순간, 동네책방과 혼술집을 찾아다니며 사장님, 작가, 그리고 나처럼 그런저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던 시간.


일상은 그 자체로 좋은 쉼이었고 영감이었다.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감정, 앞으로의 지향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잇는 환경을 나는 스스로 잘 만들어냈고 그곳에서 온 생기를 다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발견해내던 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헬싱키로 오는 비행기에서도 생각했다. 비일상의 시간과 공간에서도 일상의 마음가짐을 지켜보자고. 조바심 내거나 아쉬워 하지 말기를.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에 마음을 쏟기를. 감각을 잘 느껴보기를.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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