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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Oct 11. 2020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살고 있나요?

<나이이즘> 3호, '몸'에 대해 말하다

요즘은 마음을 챙긴다는 말을 많이 하고 듣기도 한다. 마음챙김. 그 시작과 어쩌면 끝에도, 몸이 있다는 걸 안 건 나도 얼마 되지 않은 일. 명상을 하다 보면 내가 불안하거나 화가 날 때 몸의 어디에서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를 바라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만큼 내 몸을 모르고서, 안다고 착각하고서 마음을 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짐작해본다.


내 몸을 안다는 것. 그건 내 몸을 '몸'으로 본다는 것이 아닐까. 바깥으로부터의 '욕망' 그 대상도 아닌, 나로부터의 무관심 그 '피해' 대상도 아닌 '몸'으로 보는 것.

<나이이즘> 3호의 주제는 몸. 나이이즘은 이번 호가 처음이었는데, 발행인 노트에 적힌 ‘유난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주제였다’는 말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서 ‘저의 작은 완성이 저마다의 몸으로 생을 살아가고 있을 여러분에게 작은 생기, 혹은 위로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바람에는 ‘그러했다’고 답하고 싶다. 언젠가 이 세상에 존재했고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존재할 모든 몸을 용기 있게 끌어안은 이 한 권, 참 따뜻했다.


우리에게, 나에게 ‘몸’은 어떤 의미일까.




Part1. 몸을 묻다, 당신의 몸은 ‘정상’입니까


건강한 몸을 ‘정상’이자 ‘스펙’으로 규정하고 그렇지 않은 몸은 ‘문제’로 보는 사회를 비판하는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얼핏 건강한 게 좋고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로 인해 간과하는 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긴 노동 시간과 같이, 질병을 갖게 하는 사회적 원인은 가려지고, 자기 관리를 못하거나 게으르다는 식의 질병 또는 아픈 사람에 대한 편견은 견고해진 사회가 ‘정상’일지. 이 인터뷰는 ‘질병의 개인화’를 비판한다.


아프다=자기 관리나 노력이 부족했던 것. 정말 그렇기만 할까? 이를테면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 다시 다른 일을 했다면 그 사람은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자기 몸을 돌보는 데 있어서는 노력이 부족했던 게 맞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과연 그럴 만한 시간적, 경제적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허락되었을까? 무엇보다 질병을 자기 탓, 자기가 해결할 문제로만 보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을 볼 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할 때도 그 인식을 기준 삼게 된다. 내 몸 어딘가 전과 다르게 되면 그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 여기며 탓한다. 그리고 두 경우 중 하나가 되기 십상이다. 자기가 몸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열정적으로 찾아다니거나, 자신을 향해 스스로 던진 그 원망의 날에 다친 나머지 몸을 하찮게 여기고 더 ‘막’ 대하거나.


이때, 즉 타인이나 자신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프게 된 ‘이유’나 ‘배경’에 따라서도 다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 위 언급한, 밤낮없이 일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유럽 여행이었다면? 반대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거라면? 각각의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아프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픔에 어떤 평가를 내릴까? 그리고 어떤 경제활동도 없던 상태에서 아파진 자신 또는 타인을 보는 마음과 그래도 사회가 인정하는 경제활동을 ‘성실히’ 하면서 탈이 난 자신 또는 타인을 보는 그것은 또 어떻게 다를까? ‘사회가 인정하는 경제활동’, 이 부분에서 조금 더 들어가본다면 조금도 틈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단면도 보이게 된다. ‘어떻게든’ 성취 해내는 걸 은근한 자랑이자 자부로 여기는 태도가 여전히 힘이 센 이 사회에서 ‘몸이 상했다’는 건 훈장쯤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 ‘훈장’을 받는 사람은 대체로 사회가 ‘정상’, ‘표준’이라고 여기는 삶의 방식을 사는 경우일 테고. 튀지 않게 사는.


우리가 질병이나 질병을 가진 사람을 보는 시선은 이렇게 이중적이며 복잡하고 서로 모순되기도 하지만, 그 시선들은 공통되게도 원인과 책임을 개인에게서만 찾고 있다. 질병 앞에서 개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동시에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해내야 하는 존재이다.


후에 내가 어떤 이유로 아프거나 장애를 갖게 된다면 나는 우리 사회가 지금과 같은 법과 제도를유지한다는 전제에서는 ‘일’이라는 것을 사실상 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지겠지만 한 사람으로서 ‘자아 실현’ 따위를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 ‘비혼’이라는 조건까지 갖고 있으니, 더욱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젊을 때 미리 돈도 모아 놓으라는 말은 아프거나 다치는 일이 나이든 사람에게만 그것도 예고된 채로 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무의미하고, 결혼해서 가족을 만들라는 말은 지금도 가족이라는 사회 집단에 강하게 씌워진 부양 책임을 (일부러 모른 체하는 거든 정말 모르는 거든) 모른다는 그 점 때문에 무례하다.


아프고 혼자 사는 나도 가족의 도움이나 개인의 ‘비싼’ 보험 없이 과연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를 되물을 때 자신이 없어진다. 의료 시스템에 대해 공부하고, 법과 제도가 바뀌도록 목소리를 내기로 한다. 언제든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다만 너무 큰 걱정에 압도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 보장률이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질문에서) “미국은 의료보험 제도가 세계적으로 나쁜 나라인데 그 최악하고만 비교하니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의료보험이 좋다고만 여기는 것 같아요. 건강보험 보장률 문제 외에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상병수당이 없는 거의 유일한 나라예요. 아프면 노동을 못하니까 상병수당이 지급되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죠. 1차 의료도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요. 그래서 작은 병인데도 사람들이 비싼 3차 의료기관부터 가는 경우가 많은 거예요." (p18)


“인생의 어떤 시기에 한두 달 정도 병원 시스템과 양방 및 한방에서 인간의 몸을 보는 차이, 아픈 사람들이 쓴 질병 경험들을 찾아보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태도로 질병을 보는 사람인지, 또는 의료산업 안에서 소비자로 전락되지 않고 환자로 존중받을 방법 등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개인적으로 노력을 들이기 어렵거나 꾸준한 관심과 공부를 원한다면 동네 의료사회적협동조합을 찾아보는 것도 좋아요.” (p19)


“(나이를 먹거나 몸이 아픈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잘 싸워서 이기든 두려움과 같이 살든, 흔들리는 마음을 지탱해줄 마음 근육이 필요해요. 질병이 있거나 노화한 몸으로 인생을 잘 살아내고 있는 모델을 미리 알아 두는 게 마음음 근육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요. 물론 잘 산다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겠죠.” (p20)




Part2. 여성의 몸으로 무사하게 나이 들기


이 파트는 여성과 몸의 관계를 다양한 글로 풀어낸다. 어떤 한 글만을 인상적이었다고 언급하기는 쉽지 않은데, 그건 이 파트의 모든 글들이 결국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이 여성의 것이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건 슬픈 현실이지만, 여성의 몸을 여성에게 돌려줄 방법도 분명 있다는 것.


이번 호에서 라미 작가의 인터뷰 부분에, ‘19살까지는 공부만 하라고 하다가 20살이 되면 갑자기 여자는 예뻐야 하고 잘 꾸며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는 표현이 있는데 20대 초중반의 나도 그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꾸밀 때 꾸미더라도 나의 기호와 취향을 아는 채로, 내가 꾸미는 이유에 대해 자각과 인지를 한 채로 꾸미면 또 모르겠는데 그때의 나에게는(아마도 또래의 대부분에게는) 꾸밈을 위한 꾸밈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외모를 꾸미는 데든, 외모에 대해 그냥 생각하는 데든 적잖은 에너지를 썼다. 20대 후반의 일부 시기만 해도 그랬고.


서른인 지금은 얼굴이든, 몸이든 눈에 보이는 외모라는 게 더 이상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외모 관리'라는 표현에 어울릴 법한 무언가를 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줄었다. 화장을 안 하고, 내 몸무게 모른 지는 1년이 다 되어가고. 정.말.편.하.다. 생각해보면 여기까지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누구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믿을(착각할)' 수는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에게 한 가지를 더 물어봤다. "다른 사람이 네 외모와 관련해 어떤 말을 한다면 감정이 어떨 것 같아?" 20대 초중반의 나였으면, 심장부터 뛰었을 거다. 아니, 뛰었었다. 누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하든,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딴에는 냉정한 척하며 '분석'하든, 되갚아주려고 안달나든, 그냥 맞다고 수긍하고 동굴을 파든.


지금의 내가 듣는다면? 열 번 상상해도 열 번 다 몸에서 반응이 없다. ‘그런가보다’ 싶은 게 처음 드는 생각이다. 그 다음은 ‘저 사람도 자기가 자신을 보는 그 시선으로 남을 보는 게 익숙해져 버렸구나’ 싶은 것. 여기서 자기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란 결국 외부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이 크고. 그 사람의 삶이 지금껏 외부의 평가와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 안타깝다는 마음도 들고는 한다.


자존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그것만 말하면 어딘지 아쉽다. 자존감은 늘 변하는 것이고 내 자존감도 오르내림의 폭이 전보다 작아진 것뿐 여전히 오르내린다. 앞으로는 또 자존감이 어떤 폭과 너비로 존재할지 확언할 수 없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감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끝내 해석이 잘 안 되는 지점을 만날 수 있고, 기준에 맞지 않는 자신을 향해 조바심을 낼 수도 있다.


자존감이라는 말에 그래서 하나를 더하자면 20대 후반쯤부터인가 자연스럽게, 하지만 작정하고 공부하기 시작한 페미니즘과 먼저 살아간 '멋진' 언니들의 삶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외부적인 것, 동시에 ‘우리 같이 살기 위해 같이 갈 길’의 가치를 단단하고 일관되게 전하는 그것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여기에 일일이 적기는 어렵지만 좋은 책과 글들, 직간접적 만남들이 많았고 그 모두에 깊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다. 하지만 지식적으로 배운다고 다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니까 어느 때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은 솔직히 나에게 이론의 영역, 때로는 어디가서 그럴 듯하게 다룰 수 있는 ‘말빨’의 영역이었던 것 같다. 알기는 아는데 내 삶이 바뀌는 것까지는 아직이었던 나. 그 시간을 지나고 보니 관건은 이거였다. 결국 삶이 최소한 이전의 어떤 시기와 다르려면, 오늘이 어제와 다르려면 열심히 바깥으로부터의 앎에 귀 기울이는 것에 더해 본인이 다르게 살기를 용기도 직접 내고 시도도 해봐야 한다는 것. 그렇게 크든 작든 무언가를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과정에서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는 것. 아는 것만 말고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화장과 포토샵이 없으면 문밖이든 핸드폰 안이든 거기 있는 세상과 접촉하기 두려워하고 매일 체중계에 올라가는 것이 10년 뒤, 20년 뒤의 내 삶이라 상상해봤다. 상상만으로도 사실, 좀 슬프다. 그 모습은 내가 갖고 싶거나 보여주고 싶은 어떤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그렇게 보내는 건 20대로, 지나온 시간들로 됐다. 인생, 남은 시간이 정말 길지 않음을 충분히 알겠고, 그 시간을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채우기만도 바쁘다는 걸 더욱 충분히 알겠고. 그러니 나는 그냥 내가 살고 싶은, 살기를 선택한 미래를 살고 싶다.


나는 남이 내 외모(몸)에 대해 갖지 않기를 바라는 시선,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말과 행동을 내가 나서서 내 외모(몸)에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남이 자신에게 살이 어쩌고 하는 건 기분 나빠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살 빼야 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지양하기. 그리고 아침에 눈 뜨면 거울 보고 입꼬리 한번 올려주고, 몸에 불편하거나 아픈 곳이 없는지 느껴보고, 잠들려 누우면 고생했다는 말 꼭 소리 내어 해주고. 그렇게 산다.




(중학교 때 반 친구들에게 성교육을 한 것에 대한 질문에) “보통 성이나 섹스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재빠르게 쳐다보고, 피식 웃고, 창피해했다. 또 교실에는 항상 성 차별 발언이 존재했다. ‘쟤는 여자 아니야, 너 게이 같아’ 이런 말이 계속 가슴에 꽂히며 폭력에 무뎌지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청소년이 아무렇지 않게 섹슈얼리티를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하고, 차별과 혐오를 두고 볼 수 없기에 이를 행동으로 옮긴 거다. 그때 친구들과 한 성 이야기는 ‘섹스와 젠더 구분’에 관한 내용이었다. 완벽한 성교육은 아니었겠지만 함께 성 이야기를 나누고 차별혐오, 폭력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잊지 못한다.” (p68, 김승현, 용인외대부고 페미니즘 동아리 ‘스펙트럼’ 회장)


“일상에서 바로 실천해볼 수 있는 일은, 외모 얘기를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숨쉬듯이 외모 얘기를 하잖아요. 꼭 누군가의 외모를 지적하지 않아도 다이어트나 성형, 화장품 등에 관한 대화도 많이 하고요. 이런 얘기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자신을 검열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그냥 외모에 관한 평가나 얘기 자체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보통 칭찬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식이장애는 칭찬만으로도 발생할 수 있어요. 외모 얘기를 막상 안 하려고 하면 쉽지는 않더라고요.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얘기하지 말자’라고 하긴 어렵잖아요. 저는 이제는 누군가가 외모 얘기를 하면 최소한 동조하지 않거나 화제를 바꾸려고 해요.” (p82, 라미, “나는 죽는 것보다 살찌는 게 더 무서웠다” 저자)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출산 후 처음 마주한 생식기의 모습이다. 요도가 손가락만하게 부풀어있었고, 앉으면 닭 벼슬처럼 축 늘어진 질이 바닥에 닿았다. 한동안 밑이 뻥 뚫린 듯 휑했고 배를 누르면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무엇보다 항문 사이에 올록볼록한 무언가가 자꾸 만져져서 민망한 동시에 무서웠다. 내내 숨기다 용기 내 의사에게 물었는데 ‘곧 들어갈 거예요’라는 무신경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를 낳으면 원래 하반신이 이토록 엉망진창이 되는 건가? 3kg에 육박하는 생명체가 생식기를 뚫고 나왔는데, 멀쩡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우스웠다.” (p91, 성소영) (+덧, 이 글의 취지도, 이 글의 일부를 내가 여기에 적는 취지도 결국 하나다. 출산의 과정과 결과를 ‘뇌피셜’로 알지 말고 ‘현실’ 그대로 알자고. 낳을 때 낳더라도 알고 낳자는 것.)




Part3. 내 몸대로 안녕히, Aging Story


이 파트에서는 나이가 들어가며 마주하는 몸, 그 몸을 마주하는 마음이나 생각들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엄마의 완경파티, 여러 세대 여성의 운동과 체력 이야기 등. 특히 나에게는 1인가구 비혼여성의 입원일기라는 주제로 소개된 ‘어느 날 갑자기 환자가 되었다’와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해 다룬 ‘안심하고 나이 들 수 있는 마을, 가능할까?’가 몰랐던 사실은 알게 하고 아는 사실은 행동으로 이어지게 자극했다는, ‘실용’의 측면에서 좋았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소개된 바를 옮기자면, 비영리로 의료 및 복지 사업을 하는 공동체이자 사회적 기업이다. 병원이나 운동센터는 살림조합이 하는 여러 활동 중 하나이자 수단이고 궁극적인 방점은 ‘공동체’에 찍힌다. 누구나 늙고 아플 텐데 그때 내가 마음 놓고 건강을 회복하거나, 설령 회복하기 어렵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받거나, 아예 그 전에 무리일 정도로 큰 재화를 들이지 않고도 일상에서 건강을 지키거나. 그 방법들을 ‘함께’ 찾고 실천하자는 것. 건강과 치료, 돌봄을 (특정 사회적 위치의) 개인에게만 떠맡기지도, 정부나 기업의 좋은 의료 서비스에만 기대지도 않기 위해 시작된 움직임이다. 조합원들이 출자금을 내어 설립된 것은 맞지만, 진료 등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수익은 조합원 몫이 아닌 조합 운영, 직원 복지, 지역사회 환원 등에 다시 쓰인다고 한다.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홈페이지(www.hwssocoop.or.kr)에서 가까운 곳의 의료조합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파트를 읽으면서는 앞서 다른 파트들에서 읽은 내용,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나이 든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해보고 그 모습의 주인이 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뇌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내 몸대로 안녕히’ 나이가 드는 것, 그것 말고 우리가 마음껏 꿈꿀 수 있는 것, 아니 꿈꾸어야 하는 것이 또 있을까.


나이 든 나는 미래에서 이미 현재로 와 있다. 그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는 대화하며 화해하고 보듬으며 같이 미래로 간다. 더 나은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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