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안 Jan 09. 2021

별일 없는 오늘이라서, 별수 없는 내일이라서

마스다 미리 그림 에세이 <행복은 이어달리기>

마스다 미리를 처음 알 게 된 건 언제일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그 사실이 기분이 좋다. 친한 친구 하나쯤 떠올려 보면 아마 높은 확률로 그 친구와 언제,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마스다 미리도 나에게 그런 '친한' 친구인 것만 같아서, 좋다.


<행복은 이어달리기>는 마스다 미리의 그림 에세이다. 에세이 곳곳에 한 컷짜리 그림들이 콕콕 들어가 있다. 5개의 큰 분류 아래 45개의 에세이가 담겼다. 각 편은 길어야 네 쪽 정도. 하나의 경험을 깊게 파고들어 '통찰'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한다 하기보다, 누구나 했거나 할 법한 경험을 '끄적이는' 느낌에 가깝다.


마스다 미리의 이 '끄적임'이 참 편하다. 자신의 경험에서 힘써 의미를 찾는 것 같지 않아서. 작가의 여러 만화들처럼 이 에세이집도 '밑줄 긋고 싶은 문장', 즉 메시지라 할 문장은 한 편에 많으면 두 개다. 어쩌면 힘쓰지 않는다는 그 자체보다 힘쓰지 않음으로써 읽는 이에게 곁을 내어준다는 그 사실이 나를 편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곁을 내어 주는 작가. 그래서일까. 마스다 미리의 책은 이런 날 유난히 생각난다.


- 씩씩하게 사는 내 모습이 괜히 애틋한 날.

- 하루치 몸의 힘을 다 쓰고도 정작 채운 건 없는 것 같은 날.

- 작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삶도 괜찮은 삶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은 날.

- 힘내라는 말을 듣자니 내가 뭐 그렇게까지 불쌍한가 싶고, 그 말조차 듣지 않자니 쓸쓸해지는 날.


이 사람의 책들은 다 읽고 나면 꽤 덤덤하다. 읽기 전과 읽고 난 후 나의 안과 밖이 어딘가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다. 갑자기 내일부터 새 삶을 살고 싶어지는 것도 아니고, 있었던 일들이 다 괜찮아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명상을 할 때처럼 나를 지금 여기로 데려다 놓을 뿐이다. 나도 모를 만큼 더디게, 하지만 안전하게.


곁을 내어주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기다려주는 글들이다. 기다려주는 티는 내지 않고 하던 대로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자기 이야기라는 것은 지난 시절이나 지금과 같이 '시점'이기도 하고 자신과의 또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자기 삶을 바라보는 '시선'인 것도 맞다.


자기 일상을 꾸리는 사람의 글,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의 글을 보고 있으면 나도 서서히 '나'로 돌아오게 된다. 마음이 놓이고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내일의 나는 또 하루를 살고 있다.




<행복은 이어달리기>의 1~5의 구성을 기준 삼아 이 책을 소개해본다.



1. 어른의 사생활


중년의 여성 마스다 미리가 혼자서 또는 가까운 사람들과 소소하게 보내는 일상. 그 일상 속 단상들. 대체로 시시콜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인 가운데 이 지점에서 한번 멈추게 되었다.


당연히 세뱃돈도 사용하지 않고 저금하는 아이였다. 받아서 액수를 세고는 우체국으로. 세뱃돈을 주는 어른이 된 지금은 장난감이라도 사는 편이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안다. 기다리는 일은 이제 질렸다. 종이에는 '좋은 일이 생기도록'이 아니라 '조만간, 좋은 일이 생기도록'이라고 적었다. 내일이나 모레 일어날 정도의 좋은 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 '크기보다 속도'의 마지막 부분


행복은 나중에 크게 찾아오는 것보다 작더라도 지금 바로 찾아오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즉흥적인 보상보다는 유예된 보상이 더 큰 만족감을 줄 때도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 다만 우리가 삶에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그 사실 하나일 때, 선택이 조금 더 명료해지는 것을 그녀도, 나도 말하고 싶다. 이 책의 뒷 표지에 적힌 말처럼. '눈앞의 작은 일을 건너뛰고 먼 곳에 있는 큰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행복도 그래요.' 



2. 시절을 달려 오늘이 행복


마스다 미리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을 떠올리는 현재의 모습이 주로 등장한다.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돌아보는 시선이 늘 마음에 든다. 과하게 불쌍히 여기지도, 지나치게 대단하게 기억하지도 않는. 내가 갖기 위해 노력하는 시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기억이란 것에 객관은 없다. 차라리 '주관적으로' 보자는 쪽일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나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만 과거를 기억해 냈다면 이제는 그 과거의 뒷 면도, 바닥 면도 살펴보자는 것. 그 과정에서 현재의 내 일부가 서서히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어른이 된 나는 생각한다. 어른만 되면, 이렇게 생각했었지만 그날 밤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취급된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맛있는 야키소바를 먹고 싶다며 잠드는 밤도 있지만, 분함으로 괴로워하는 밤도 여전히 있다. - 가족과 놀러간 유원지에서 옥수수 노점 주인이 어린 자신에게만 탄 옥수수를 준 기억을 떠올린 '포장마차'의 마지막 문장


내가 좋아하는 쭉 뻗은 길을 지나 세탁을 맡긴 뒤, 빵을 사고 보라색 팬지를 두 포기 샀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전통 과자점에서 떡꼬치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 어릴 때 두 발 자전거를 배우던 기억을 되짚고, 이제는 두 발 자전거쯤 거뜬히 타는 일상을 표현한 '자전거'의 마지막 문장



3. 어른의 현실적인 상상력에 행복지수 상승!


어쩌면 가장 마스다 미리스러운 이야기들이지 않을까. 살면서 해왔던 '별뜻 없는' 상상들을 재미나게 풀어낸다. 퀴즈 프로그램 보다가 상상, 최전초밥의 미래를 상상 그리고 오징어가 된 상상 등. 귀여워 미소 짓게 되는 문장들이 있다.


춤을 춰보니 아니나 다를까 즐거웠다. 점점 유쾌해졌다. 양손을 크게 대각선으로 펼치는 '오징어소면' 포즈가 특히 맘에 들어, 어서 오징어소면 부분이 되었으면~ 하면서 춤을 추었다. - 홋카이도의 한 지역에서 즐긴 축제를 그려낸 '오징어가 되었다' 중에서  



4. 엄마와 나와 아빠와


말 그대로 엄마와 아빠와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따뜻하게 다가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드러난다. 가족 관계가 언제나 몽글몽글하지만은 않음을 우리는 알지만 가끔은 이런 글들을 읽으며 너무 깊숙이 묻어두는 바람에 잊고 있던 '좋은' 기억들의 먼지를 털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잘 지내지?'라는 엄마가 보낸 메일에 '잘 지내요'라고 답신할 수 있는 행복을 생각한다. - '아빠의 자전거 색깔'과 '엄마가 색깔을 표현할 때' 두 이야기 사이에 그려진 그림의 문구


하늘이 있어 다행이야. 하늘이 없다면 어디를 봐야 좋을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 아빠가 돌아가시고서 겪은 상실의 슬픔과 함께 자신만의 속도로 그 슬픔을 받아들이겠다고 잔잔하게 전하는 '아빠가 없는 아버지의 날' 바로 뒤 그림에서.



5. 아무 일도 없는 오늘은 좋은 날


이 부분의 이야기들은 '별것 없는' 일상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일상을 정돈해 '의미'를 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 지친 날이면: '지친 표졍을 지으면 상대방을 신경 쓰이게 할 테니까' '지친 표정도 짓지 못한 채로 완전히 지쳐버린' 날, 우연히 마주친 가게에서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자신의 손만 들여다보며 기다린 나폴리탄을 '볼이 미어지도록' 먹고 피로가 조금은 사라졌다고 말하는 이야기.


* 애플파이에 하이볼 인생: '봄의 저녁 햇살이 비춰 들어와' '가게 전체가 짙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울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날, '비밀기지' 같은 찻집에서 애플파이에 하이볼을 마신 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5년 후의 자신을 만나러 갈 수 있다면 정답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생각해보니 내게는 지금의 나뿐이었다'며 다시금 자신을 챙겨 일어나는 이야기.


* 아무 일도 없는 오늘은 좋은 날: 잠시 잠이 들었다가 늦은 저녁 깨어난 뒤, 영화를 보러 나가기로 한 날. 길거리 겨울 분위기를 보며 떠올린 어린 시절 읽은 그림책 이야기, 걸으며 본 어느 집 모습. 대중 없는 듯 보이는 '본 것'과 '떠올린 것'들이 쓰여 있는 이야기.


바로 위 이야기에 대해서는 조금 더 적어본다. 왜냐하면 그 하루들이 내가 가장 많이 지나왔고 앞으로 지날 하루에 다름 없으니까. 흔하고 쉬워보이는 하루이지만 누군가는 이 같은 하루를 꿈 삼아 생을 걸기도 하니까.  


여러 가지 일이 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특히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은 좋은 날에 해당한다. 전철을 타고 가장 가까운 영화관으로. 티켓을 산 뒤, 긴 줄을 서서 생맥주와 팝콘도 샀다. 영화 관람이 끝났다. 나의 오늘은,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종료했다.




건강히, 내일도 만나자. 이어지는 삶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살고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