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안 Apr 16. 2021

쏟아버린 마음

4월 10일, 쑥을 캐러 갔단다. 쑥국 끓여서 보내주려고. 엄마가 보내준 사진 속, 한 아름 되어 보이는 자루에는 쑥이 소복했다. 이 양반들 참. 


사진 한 장을 봤을 뿐인데 머릿 속에 영상이 그려졌다. 쑥을 캐러 가자고 이야기 하는 엄마와 아빠, 쑥 뿌리 쪽에 칼을 살짝 쑤셔 쑥을 뜯어내고 담는 엄마와 아빠, 저기에 쑥이 많다고 말하는 엄마와 아빠, 이제 그만 캐도 되겠다고 말하는 엄마와 아빠,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내주는 엄마와 아빠. 


아빠는 몇 해 전 무릎 수술을 받아서, 오래 쪼그려 앉거나 그렇게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는 게 막 편하지는 않다. 여담이지만, 제사를 지낼 때도 '장손' 아빠는 무릎 때문에 절을 가끔 생략한다. 조상도 이건 용서해야 된다면서. 피식 웃었다. 그런 아빠가 절을 한번도 빼먹지 않은 유일한 자리는 할머니 장례식이었다.


4월 12일, 쑥국이 도착했다. 내가 아침에 국만 뜨끈히 데워 한 그릇 먹고 나갈 때가 많은 걸 알아서, 아침 식사로 좋도록 들깨를 많이 넣어다고 했다. 그리고 도다리! 도다리 살을 일일이 발라 넣었다고 했다. 바른다고 발랐는데도 잔 뼈가 있을 수 있으니 잘 보고 먹으라고 했다. 이 양반들 참.


4월 13일, 회사에 점심 도시락으로 쑥국을 챙겨갔다. 그릇째 전자레인지에 넣다가, 이상하게 손이 미끄러져 전자레인지 안에서 국이 쏟겼다. 반쯤 쏟긴 것 같다. 휴지를 챙기러 가는 사이, 친한 동료가 전자레인지로 오기에 "안에 국 쏟아서 닦아야 되니까 좀만 기다려요." 말했다. 전자레인지를 열어본 동료는 같이 휴지와 빈 봉지를 챙겨와 국을 '쓸어담았다.' (쑥, 들깨, 도다리가 한 움큼 들어간 국이니까!) 


"와, 냄새 너무 좋은데." "그쵸. 엄마가 보내줘가지고." 전자레인지 안에서 널브러지듯 쏟긴, 썩 보기 좋지 않은 국을 주저 않고 같이 닦아준 것도,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해준 것도 자리에서 밥을 먹는 내 생각났다. 녀석 참.


밥을 먹는 동안 나를 찾아온 감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진 한 장을 보며 떠올린, 사진 뒷편의 움직임들이 다시 살아났다. 쑥을 캐는 두 사람, 다듬고 씻는 두 사람, 생선뼈를 골라내는 두 사람, 소분 포장하는 두 사람. 흘려버린 것이 아까웠고 남아있는 것이 귀했다.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나, 새삼스러웠다. 아무래도 (외국으로) 떠나는 게 맞기는 맞나보다. 


나에게 온 마음이 내 앞에서, 내 안에서 쏟아진 걸 모르고 사는 날이 있었고 쏟아진 걸 모르는 척 사는 날도 있었다. 지금도 그런 날들이 있다. 없지 않다. 한편, 다른 날들도 있다. 타인의 쏟긴 마음을 미안해하고, 다음엔 쏟기기 전 찰랑찰랑할 때 내가 먼저 알아보겠다고 약속하는 날들.


네 앞에서, 네 안에서 마음이 쏟아졌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고 쏟아진 걸 같이 그러담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자리의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것은 나의 의무. 


마음을 쏟아버린 4월.


작가의 이전글 봄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