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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Jan 07. 2020

세상에서 가장 효과 좋은 마취제

겨울비가 반갑게 내리던 화요일 아침. 오전에 급히 만나기로 했던 분과의 약속을 기다리며 종각역 근처의 서점에 들렀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이 꽤나 많았다. 내부는 기분 좋은 백색소음으로 깔리던 책 넘어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아주 작은 속삭임들로 가득 차 있었다(희미하게 들려오던 창밖의 빗소리도 훌륭했다). 오랜만에 들뜬 마음으로 서점 내부를 서성이며 책들을 구경하던 중 어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로 보이던 중년 여성 한 분과 따님으로 보이는 2-30대(?) 여성 분이 시/에세이 코너 앞에 머무르고 있었다. 젊은 여성 분은 곧 출산을 앞둔 듯했다. 나 또한 오랜만에 시집을 사기 위해 방문했던 터라 자연스레 근처로 이동했다. 그리고 두 모녀의 목소리가 옅게 흘러왔다.

"너 태어나던 날도 한 여름 장마 때문에 낮에 태어났는데도 온 세상이 깜깜했는데 오늘이 딱 그렇네. 아침인데도 비 와서 이렇게 어둑어둑하니까 옛날 생각난다야."

"그게 몇 년 전인데 아직도 정확히 기억해? 엄마, 그때 엄청 힘들었다며. 아빠가 나 생일 때마다 맨날 그랬어."


30년도 더 지난날의 날씨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던 어머님, 그걸 왜 기억하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웃고 있던 딸.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맞아, 그때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 밖에 천둥, 번개가 막 쳤다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더라!"

"자꾸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나 지금 충분히 무섭거든?"

"비 와서 눅눅한 공기에 아기 울음소리가 막 들려오는데... 그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아픈 게 하나도 안 느껴지더라."

"첫 아이라고 엄청 긴장하면서도 좋았나 보네, 엄마가!"

"너도 낳아봐. 진통제 맞은 거 다 필요 없고, 너 울음소리가 제일 효과 좋더라."


짧고 임팩트 있는(?) 대화를 마치고 두 모녀는 정겹게 팔짱을 끼고 서점을 나섰다. 때 마침 나의 약속 시간도 임박했고 자연스레 카페로 향했다. 나 역시 생일마다 부모님께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의 정확한 날씨와 시간, 분위기까지. 4월의 어느 새벽, 동이 막 트기 직전 희미하게 밝아질 무렵 나의 울음소리가 터졌다고.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있냐부터 물으셨고 의사의 긍정적인 끄덕임에 마음을 놓으셨다고 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약속을 마치고 지하철로 다시 이동하던 중, 오래된 기사 하나가 페이스북 피드에 떴다. 1년도 더 된 기사가 갑자기 왜? 해당 기사의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10시간 진통 끝에 손주 출산한 딸 위해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

노산과 난임 등으로 1.9kg '칠삭둥이'로 태어나 항상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이었다던 산모 A 씨. A 씨 또한 출산 예정일보다 2주가량 일찍 진통이 오는 바람에 10시간이 넘게 고통을 참아야 했단다. 겨우 제왕절개를 통해 출산했고 오랜 시간의 진통 끝에 산모 A 씨는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출산 소식을 들은 A 씨의 양가 부모님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시부모님과 A 씨의 어머니 또한 곧바로 아이가 있는 신생아실로 향했다. 그런데 A 씨의 아버지만큼은 달랐다. 출산하느라 고생했을 딸부터 찾고자 A 씨의 아버지는 산모가 있는 병실로 달려갔다.


"팔뚝보다 작았던 내 딸이 새끼를 낳았네. 얼마나 아팠냐."


하지만 이어진 기사의 마지막 내용은 서글펐다. 당시 태어난 손주가 100일이 조금 지날 무렵, A 씨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쓰여있었다. 손주보다 자신의 딸을 먼저 걱정했던 한 아버지의 사연. 오늘 내가 마주했던 풍경과 묘하게 닮아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서점에서 마주했던 한 어머님의 마지막 말씀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진통제 같은 거 다 필요 없고 너 울음소리가 제일 좋다는 이야기. 사람에게 있어 어쩌면 가장 효과 좋은 마취제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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