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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Jan 08. 2020

그녀와의 데이트를 위한 사전 답사

대학가 근처의 한 버스 정류장.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옆에서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분명 데이트를 위해 이 정류장에서 만난 듯했다). 두 사람 다 꽤나 어려 보였던 이 커플은 오늘 하루 어디를 가서 무엇을 먹으며 오늘 하루 어떤 데이트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대충 듣기에도 결론이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서 결국 어디 갈 건데?라는 질문은 목적지를 무시한 채 빙빙 돌고 있었고 서로의 옷차림, 머리 모양 등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뿐이었다. 하긴, 어딜 가서 무엇을 먹더라도 그저 서로만 있다면 좋을 때가 아닌가. 자신들이 타려는 버스가 몇 분 뒤에 도착하는지는 1도 관심이 없는 이 커플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 또한 대학 새내기 시절의 부끄러운 연애가 생각이 났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난 그랬다. 여행을 떠나도 구체적인 계획과 동선을 짜지 않았다. 완벽한 일정으로 떠나는 여행이 가끔은 숨 막힌다 그래야 하나. 지금도 여행을 떠날 때면 커다랗게 이동하는 동선만 정한 뒤 발길이 닿는 곳으로 움직여왔다. 하지만 새내기 시절, 20대의 첫 연애만큼은 달랐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와의 첫 데이트 장소는 '뚝섬유원지 한강 공원'. 물론, 해당 장소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근처에 뭐가 있는지도 전혀 몰랐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도무지 계획이 서질 않았다. 친근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 장소가 첫 데이트 코스가 된 까닭은 단 하나. 그저 한강 공원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정말로 예쁘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당시 우리는 주저 없이 뚝섬으로 향했다.


출처 : Daum Blog_이강식_청담대교/뚝섬유원지 야경


서울 지리가 익숙지 않았던 터라 데이트에 앞서 내게는 어떠한 조치가 필요했다. 성공적인 데이트를 위한 만반의 준비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전 답사'였다(그녀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기에 잘 몰랐음에 분명하다). 당시의 정확한 약속 시간이 기억나진 않지만 한강 노을을 보기 위해 만났던 것으로 짐작하건대, 대략 오후 5시 전후였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먼저 7호선 뚝섬유원지역으로 향했다. 해당 역의 출구에서 만난다는 가정 하에 자연스레 분위기 좋은 카페나 공원 벤치, 맛있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맛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몇 번 출구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이며 동선은 자연스레 이쪽으로 향하고, 무심한 듯 지나치며 '저기 카페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말과 함께 입장하는 것. 물론, 그 카페 또한 사전 답사 과정에서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셔보고 결정하는 아주 신중한 곳이 되겠지. 그렇게 빈틈없는 사전 답사를 하고 있던 와중에 커다란 변수가 생겨버렸다. 그 넓디넓은 한강 공원 한복판에서 그녀를 마주친 것이다. 분명 나는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먼저 와서 둘러보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이었을까.


나중에서야 듣고 보니 그녀 또한 나와의 데이트를 위한 '사전 답사'를 치열하게 진행하던 중이었다(심지어 2시간 전에 나왔던 나보다 먼저 뚝섬유원지역 근처에 도착했다고 했었다). 약속 시간이 5시였던 두 남녀가 2시간씩이나 미리 도착하여 서로가 근처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데이트 코스를 '답사'하고 있었던 신기한 풍경.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연애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까닭이 있을까. 과거 어떤 드라마에도 나왔던 명대사지만 그 시절 나의 연애에도 꼭 들어맞는 말이기도 했다.



"원래 연애라는 게 내가 해도 되는 걸 굳이 상대방이 해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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