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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Jan 10. 2020

세탁소에서 생긴 일

패딩 모자에 달린 털 어디 갔어요?

평온하던 나의 일상에 <발리에서 생긴 일>처럼 찾아온 이상한 스릴러. 다행히 비운의 남주인공이 되지는 않았지만 꽤나 당황했던 일이 있었다.



이틀 전, 집 근처 세탁소에 겨울 패딩 한 벌의 드라이클리닝을 맡겼다. 그리고 오늘 점심 즈음에 찾아오라는 세탁소 사장님의 말을 따라 정확히 12시에 세탁소에 도착했다. 세탁소를 찾는 모든 손님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내 이름을 말하고 천장 위에 끝없이 걸려있는 많은 옷들을 말없이 먼저 스캔하기 시작했다. 이후 점심 약속이 있었기에 빠르게 찾은 뒤 세탁소를 나설 생각이었기 때문에.

천장에 걸려있던 많은 겨울 패딩 중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내 것을 찾아냈다. 스테이플러로 찍혀있는 작은 포스트잇에 내 이름도 어렴풋이 보였다. 이 많은 옷들 중에서 한 번에 찾다니. 오늘은 재수가 좋으려나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천장 위쪽에 걸려 모자 부분이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 문제가 없겠구나 했는데 긴 막대기로 걸쳐 패딩을 내려보니 모자 탈부착하는 털이 없었다(좌절과 관련된 BGM이 들리는 듯했다).


"사장님, 제 거... 모자에 탈부탁하는 털은 어디 있나요?"

"에? 이게 무슨 소리여. 맡길 때부터 없었던 거 아녀?"

"아니에요. 분명히 털이 달려있는 상태로 세탁을 맡겼는데요."

"아니... 하루에 몇 벌이 들어오는데 내가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해유. 내가 분명 버렸을 리가 없는데 지금 없는 거면 처음부터 없었던 거 아니요?"


구수한 사투리로 내 패딩에는 '원래부터 없던 털이었다.'라고 주장하시는 사장님. 깨끗하게 드라이클리닝 된 패딩을 찾고 나서는 시간을 30초 정도로 잡았던 내게 이 무슨 스릴러 요소인가. 세탁소에서는 뜬금없는 한낮의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 맡겼을 때 분명 털이 부탁되어 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나는 바로 휴대폰부터 꺼내 사진첩을 뒤졌다. 당일 CCTV처럼 패딩의 온전한 모습을 증명할 수는 없겠으나 '내 패딩의 원래 모습은 이렇게 생겼어요.'라고 외쳐야 했다. 그리고 찾아낸 한 장의 사진. 사장님께 '이거 보세요'하며 휴대폰을 내미는데 괜히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고도 황당했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정말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ㄴㅇㄱ).

"아이고, 원래 털이 있는 옷이구만! 이게 으(어)디로 사라졌대!"


(사장님...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ㅎㅎ)


순간 세탁소 안의 분위기는 '털의 진실을 찾아서'라는 추리 물에서 순식간에 버라이어티 예능으로 바뀌었다. '털이 있었느냐'라는 명제를 증명해내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는 이제 한 팀이 되어 '털'을 발견해야 했다. 나와 사장님은 좁디좁은 세탁소 모든 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셈법이 복잡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작년 겨울에 나름 큰 마음먹고 지른 비싼 패딩인데 털이 없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 배상을 요구해야 하나, 그래도 원래 없었다면서 딱 잡아떼시면 어떡하지?


그 순간, 올림픽 성화 봉송처럼 세탁소의 옷 가지 사이로 털 뭉치 하나가 높게 솟아올랐다.


여깄네!!! 찾았어유!!!


해맑게 달려오시는 사장님의 모습이 왜 이렇게 웃겼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엔 혼자만의 걱정이 가득했는데, 순수하게 털을 들고 반갑게 소리치시는 사장님의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60대 중후반의 할머님이셨던 사장님 또한 여간 당황한 게 아니셨을 터. 알고 보니 드라이클리닝을 하시는 과정에서 털을 떼어 따로 세탁을 하셨는데 자꾸 깜빡하시는 버릇 때문에 세탁망 한 구석에 방치해 두신 것이었다. 무언가에 눌려있었기에 털은 깔끔하지(?) 못한 상태였고, 냄새도 말리지 않은 수건 빨래 비슷한 향이 났다.


털을 찾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당장 가져가기는 무리인 상태. 다행히 사장님의 응급처치로 털은 원래의 모양과 냄새로 돌아왔지만 애초에 30초면 충분할 줄 알았던 세탁소 스케줄은 30분이 넘게 오버된 셈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당황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웃으며 이야기했던 세탁소를 뒤로 하고 결제를 하려는데 사장님이 나를 문 밖으로 밀어냈다.


"내가 오늘은 쪼매 미안하니까 그냥 가유! 다음에는 털 예쁘게 해 줄 테니까 또 오시던지~"

분명 시간을 한참이나 뺏겨서 기분이 참 별로여야 하는데 최근 내게 벌어졌던 그 어떤 에피소드보다 유쾌한 30분이었다. 털을 발견하고서 내게 보여주셨던 할머님의 환한 웃음은 세상 무엇보다도 맑고 순수한 '기쁨'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어느 운수 좋은 날에 내게 찾아온, 흔하디 흔한 소설의 5단계 구성처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완벽했던 시트콤.


<세탁소에서 생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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