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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Feb 09. 2020

인생 한 컷

아직 찍지 않은 우리들의 인생 한 컷

술자리에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년 전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팀장님의 사연이었다. 지금은 누구보다 훌륭하고 멋진 기획자로 활동하고 계시지만, 약 15년 전 스물다섯 청춘의 시절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참 많았다고 하셨다.


그는 취업, 창업, 아르바이트 등 스스로 인생의 길을 찾겠다고 집을 뛰쳐나왔다고 했다. 원룸 자취방을 구할 돈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루빨리 아르바이트를 구해 2주 안에 월세를 낸다는 조건으로 저렴한 고시원 방에 찾아들었단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서류 접수부터 면접까지 수십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번듯한 대학까지 나왔지만 세상은 몹시도 차가웠다. 그 해 찾아온 기업 공채에서도 모조리 떨어졌다고 했다. 집주인과 월세를 약속한 날은 점점 다가왔고 그는 최후의 방법으로 일용직 근로 사무소를 찾았다. 새벽부터 줄을 서야 겨우 선착순으로 현장 배치를 받을 수 있다는 곳. 그는 그곳에서조차 무섭게 외면받았다. 자연스레 세상의 모든 것들이 두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던 상황.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갔음을 느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 넓은 세상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함께 할 수 있는 회사, 심지어 자신의 잠재력을 믿어줄 사람조차 없다고 생각했단다. 자존감 또한 당연히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 그렇게 신촌의 어느 놀이터에서 그는 하루 종일 술을 마셨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만취해 있었다. 그리고 당시 팀장님의 여자 친구 분이 놀이터에서 술병과 함께 누워있던 그를 하루 종일 찾아다닌 끝에 발견했단다.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녀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딱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바닥인 순간일 거야. 사진 한 장 찍어주라.'


(당시 신촌의 어느 놀이터에서 팀장님의 사진을 찍었던 여자 친구 분은 지금의 사모님이 되었다.) 술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제는 꽤나 담담하게, 자신 있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사람마다 '인생 한 컷'이 있을 거라 장담했다. 아니,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인생의 변곡점. 아주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도 잠깐의 기울기와 변화가 왜 없겠는가. 그토록 바라던 회사의 합격 소식,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 사회적인 성공과 명예의 순간 등...


술 한 잔 기울이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의 '인생 한 컷'은 언제였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찾아오긴 했을까?). 하지만 누구나 충분히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다.


그 언젠가 광화문을 지나며 마주했던 글판이 떠오른다.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지 않는 저 둥근 공처럼


시인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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