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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Feb 18. 2020

숙녀에게

인간의 뇌는 한 번 경험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어딘가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어서 찾을 수 없게 될 뿐. 누군가의 모든 기억은 과거를 마음대로 편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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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랜만에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나와 홀로 자취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과의 연락도 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가끔씩 함께 하는 저녁 식사와 아늑한 집의 포근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것들이었다. 집에서의 시간을 뒤로 한채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날의 아침. 엄마가 갑자기 예민한 행동과 말들을 쏟아냈다. 화를 내며 아침부터 집안의 분위기를 뒤엎었고, 마음의 상처가 되는 말들을 막힘 없이 했다.


그래서 나도 바보처럼 멋대로 굴었다(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사춘기 열다섯 아이처럼 방문을 쾅하고 닫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홀로 자취하며 힘들게 타지 생활을 하는 아들이 오랜만에 왔는데... 그것도 돌아가는 날 아침에 그렇게 행동하는 엄마가 미웠다. 그래서 그 어떤 대꾸도, 행동도 하지 않고 엄마를 외면했다. 다음 주에, 다다음주에 오겠다는 말 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서울로 넘어와서도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하루 이틀 정도만 안 하려 했었지만 일부러 회사 일에만 푹 빠져 있으려 하다 보니, 엄마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시간이 3주가 넘게 흘렀다. 전화 한 통도, 문자 하나도.


사실, 엄마가 힘들다는 것을 정확히 몰랐다. 엄마의 몸 상태도, 마음까지도 지쳐있는 상태라는 것을. 가족 4명이 모두 모여있는 단체 대화방에서 엄마는 답이 없는 나의 안부를 계속 물었다. 밥은 먹었느냐고, 퇴근은 해서 집에 들어갔느냐고, 날씨는 어떠냐고, 세탁기는 잘 돌렸냐고. 엄마는 나의 사소한 모든 것을 궁금해했다. 내가 그토록 차갑게 그녀를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난 주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는 전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부를 물었고 전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엄마에게 더 미안했다. 지난 3주간 자신을 무시했던 나쁜 아들이라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엄마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 티를 내면 내가 또 돌아설까 봐 무서웠을 것만 같다. 나는 정확히 안다.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이기에.


인간의 뇌는 한 번 경험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보냈던 날, 속으로 많이도 울면서 스스로를 자책했을 것이다. 엄마가 많이 힘들고 속상해하신다는, 여동생이 몰래 보낸 문자에 나 또한 홀로 눈물을 삼켜냈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내고 돌아섰던 날은 엄마의 머릿속 어딘가에 평생 남아있겠지. 그러니 이제는 아들만 보면 좋다고, 내가 집에 오는 날만 기다린다고 했던 어느 숙녀에게 그런 상처를 주지 말아야지. 변진섭의 발라드를 참 좋아하는 우리 집 숙녀. 나 또한 그녀의 사소한 일상이 매일 같이 궁금함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 그대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 싶지만

어쩐지 그댄 내게 말을 안 해요


변진섭, <숙녀에게> 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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