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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Jun 01. 2020

조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때로 한 사람의 인생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온다. 그와 혹은 그녀와 나누는 감정이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뜨거운 우정이 되기도 하며, 존경과 고마움 등으로 조금씩 모습과 색깔을 바꿔내기도 한다.


최근 드라마 <화양연화>를 챙겨보고 있다. 이 안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이야기 전개 따위는 없다. 그저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에 마주했던 사람을 잊지 않고 멀고 아픈 길이었지만 무심하게 또 한 번 걸어보려는 이들의 이야기다. 가장 빛이 나던 시절이었지만 누군가를 지키기에 가장 힘이 없던 시절을 비추는 거울 같은 이야기.



젊은 시절의 유호진 PD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적어냈다.

요컨대 한 여자는 한 남자에게 세상의 새로운 절반을 가져온다. 한 사람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협하기 때문에 세상의 아주 일부분 밖에는 볼 수 없다. 인간은 두 가지 종교적 신념을 동시에 믿거나, 일곱 가지 장르의 음악에 동시에 매혹될 수 없는 것이다.

친구와 동료도 세상의 다른 조각들을 건네주지만, 연인과 배우자가 가져오는 건 온전한 세계의 반쪽에 가깝다. 그건 너무 커다랗고 완결되어 있어서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져오는 세상 때문에 나는 조금 더 다양하고 조금 덜 편협한 인간이 된다.

실연은 그래서 그 세상 하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인이 사라진 마음의 풍경은 그래서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그 밀물이 남기고 간 거대한 빈 공간에는 조개껍질 같은 흔적들이 남는다. 나는 혼자 그 식당을 다시 찾아가 보기도 하고, 선댄스의 감독이 마침내 할리우드에서 장편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이따금 발견하고 주워 들여다보는 것은 다분히 실없지만, 아름다운 짓이기도 하다.

'사랑'에 관한 정말 깊고 따스한 글이다. 자신의 사랑을 기억하는 유호진 PD의 멋진 방식이 참 부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기억하고 싶은 문장은 따로 있다.


친구와 동료도 세상의 다른 조각들을 건네주지만,


연인과 배우자가 가져오는 온전한 세계의 반쪽은 감히 다른 존재들의 가치에 비할 것이 못됨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좋은 친구들과 동료가 가져오는 새로운 삶의 조각들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 한다. 연인과 다투면 친한 친구를 찾아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까닭이 무엇인가. 우리들이 저마다의 편협한 생각과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삶의 조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소한 풍경이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 만나면 무심한 듯 하지만 항상 먼저 연락해주는 친구, 나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어주는 친구. 한 사람은 스스로 온전하게 자신의 가치를 다채롭게 만들어 낼 수 없다. 다른 삶의 조각을 가진 이들과 서로의 조각을 맞추려 애를 쓸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어딘가에 조화롭게 서 있어야 함을 소중히 배우게 된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 알려준 고마운 삶의 조각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지난주, 나는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조각 하나를 잃었다. 나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고 내 모습의 한 구석을 꿰차고 있던 조각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다.


그와의 마지막 카톡은 꽤나 오래전이었다. 서로 먹고 산다고 바빠서 제대로 연락 한 번 더 해주지 못한 것이 깊게 파인 흔적과 상처로 남아버렸다. 우리는 지금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라 자신 있게 외쳤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가장 지켜주지 못하는 힘없는 시절임을 알지 못했다.


내가 그를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나는 더 못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몇 년 전에 찍었던 사진과 대화를 꺼내보며 주워 담는 것이 유호진 PD의 말대로 다분히 실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짓이었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분명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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