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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Apr 05. 2022

이 모습에 반하셨겠지

꽤나 최근의 일이다. 


못해도 15년이 넘게 연락이 되지 않던 엄마의 조카, 그니까 내게는 사촌 누나였다. 그녀가 대뜸 엄마에게 보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고 당장 오겠다고 했다. 워낙 흉흉한 일들이 많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는 만남을 말렸으나 엄마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렸을 때도 사고를 많이 쳐서 외삼촌의 속을 썩였다던 그녀는, 서른 중반을 넘은 나이에 술에 취해 우연히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기억에도 나지 않을뿐더러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던 그녀는 먹지도 않을 비싼 음식을 마구 시켜댔다. 택시로 집을 보내려 했더니 이번엔 엄마에게 과일을 사주겠다며 골랐지만 카드와 돈은 역시 술에 취해 잃어버리고 없는 듯했다.


물론, 그녀도 힘든 일이 있는 듯했다. 아직 어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술에 취한 그녀의 광폭 행보를 케어한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핏줄인 조카가 술에 취해 와서 난리를 폈지만 엄마는 어떻게든 안전히 챙겨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잔뜩 취해 말을 듣지 않았고, 모든 것을 아버지가 함께 챙겼다.


먹지도 않을 음식을 마구 시켰던 식당에서도, 돈도 없이 집어 들었던 과일을 산 것도 아버지였다. 망설임 없이 계산하고 그녀를 끝까지 보냈던 아버지는 엄마에게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녀가 잘 도착했는지 전화라도 해보라는 말과 함께.


나는 두 분의 대화를 뒤에서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엄마는 30년 전 아빠의 이 모습에 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엄마의 편에 섰을 것이며, 30년 전에도 그날과 같은 든든한 모습이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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