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는 1020세대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오늘. 음악과 앨범이라는, 그 시절에는 끊을 라야 끊을 수가 없었던 이 감성적인 연결고리마저 희미해진 오늘. 그런 측면에서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이 정말 궁금했다. 달려가서 보고 싶었다.
레트로(Retro :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흐름으로 '복고주의', '복고풍'이라고도 불린다)의 열풍을 이어 뉴트로(New-tro :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경향)마저 한껏 소비되는 최근의 다양한 풍경들을 한 번쯤은 다들 마주친 적이 있으리라. 굳이 말하자면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은 과거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은 ‘레트로’에 가까울 것인데, 배우 정해인과 김고은이 어떤 모습과 표정으로 1994년으로 돌아갔을까 하는 의문 또한 강하게 들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 타임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가 올라가는 순간. 그때가 되어서야 오늘이 2019년의 어느 늦은 여름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993년생인 나는 사실, 유열이라는 가수를 잘 알지 못했다. 기억에도 흐릿한 어린 시절, 거실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시던 엄마가 습관처럼 틀어두시던 ‘라디오’라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은 1994년, KBS 라디오에서 가수 유열이 직접 진행했던 <유열의 음악 앨범>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지금은 사라진, 1986년 겨울에 열린 MBC 대학가요제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였던 노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노래를 통해 당시 대상을 수상하며 유열은 자상한 신사 이미지로 여성 팬들에게 어필했고, 이는 새로운 스타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늘 기적이 일어났어요.”
1994년 가수 유열이 라디오 DJ를 처음 진행하던 날. 엄마가 남겨준 빵집에서 일하던 미수(김고은)는 우연히 찾아온 현우(정해인)를 만나게 된다. 지극히도 평범한 우연처럼 보였던 둘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다. 해당 장면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 DJ의 멘트는 더욱 인상적이다. ‘비행과 사랑’의 첫출발에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가 서 있는 작은 빵집의 공기는 잔잔했지만 둘의 눈빛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강한 이끌림이 흐르고 있었다. 둘은 머지않아 설레는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연락이 끊기게 된다.
다시 기적처럼 마주친 두 사람은 설렘과 애틋함 사이에서 마음을 키워 가지만 서로의 상황과 시간은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 이처럼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은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의 우연한 만남과 엇갈림, 이별 그리고 찰나의 감정을 보여주며 흘러간다. 계속되는 엇갈림 속에서도 라디오 <유열의 음악 앨범>과 함께 우연과 필연을 반복하는 두 사람. 영화의 시간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가장 처음에 등장했던 대사를 곱씹어 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다름 아닌 ‘기적’이라는 말의 의미.
어제와 다를 것 없던 오늘, 그리고 여전히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내일을 기다리는 현우(정해인). 그에게 라디오의 DJ가 바뀐 것과 스쳐가는 빵집에서 미수(김고은)를 마주한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기적’이었던 셈이다.
또한,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를 둘러싼 인물들은 두 사람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준다. 다만, 그 장치가 조금은 허술하여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아주 작은 소모품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쉬운 면이라 할 수 있겠다. 감성 멜로 영화의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라디오라는 매체에서만 줄 수 있는 높은 친밀감과 감성을 잘 살리는 그 시절의 음악이 마치 ‘ASMR’처럼 귀 호강을 시켜주었고, 미수와 현우를 연기했던 배우 김고은과 정해인의 케미 또한 굉장했다. 영화를 보고 있는 순간에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그 여운이 진할 것이라는 예상 또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때,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기다렸는데…”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판단으로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기약 없이 현우(정해인)를 기다리는 미수(김고은)처럼 말이다. 각자 꿈꾸었던 ‘기적’은 어디선가 예고 없이 찾아왔고, 이들이 재회하는 모든 순간에는 그 시절의 음악과 라디오가 함께 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 감정을 나누고, 사랑에 빠지는 오늘의 우리들은 깊게 알지 못할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멋지고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들이 여럿 흘러나왔다. 몇 시 몇 분에 전화할 테니 기다려달라는 말.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의 말.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가까이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친구와 연인에게 자신이 타고 있는 지하철의 도착 시간뿐만 아니라, 몸을 싣고 있는 열차 칸 위치까지 공유할 수 있는 오늘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물론, 그 시절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간절함이 부족하다거나 모자라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조금 느리고 불편했지만 오늘의 그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전하고 기다렸던 시절의 감성 또한 우리 곁에 아주 잠시나마 있었다는 사실을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