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진 Sep 01. 2019

밤에 먹어야 건강한 라면이 언젠가는 나오기를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쏘아 올린 작은 바람

“우리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도 말고, 우리 지금 당장의 위기에 집중하자!”


“어떤 위기?”


“라면이 먹고 싶어!”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 등장하는 1화 주인공들의 대화. 그리고 이어지는 독백.


‘밤에 먹어야 건강한 라면이 나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냥 그 정도의 설렘을 느끼고, 이 정도의 위기에 몇 번쯤은 져도 무관한 행복한 인생이 되길.’


참 유쾌하면서도 멋진 말이다. 셀 수 없이 많은 고민과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는 하루하루, 저마다 생각하는 일탈의 정도는 크게 다를 텐데 말이다. 오늘 밤, 잠들기 전에 내가 마주하는 가장 큰 위기가 야식으로 먹는 라면이라면? 이 세상 누구보다 그 순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2019년 8월 첫 방송을 시작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제목 한 번 깔끔하다. 사람 참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저 흥미로운 드라마 제목과 달리 난 ‘드라마’가 체질이 아닌 많은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캐릭터와 드라마 세상에 흠뻑 빠져서 한 번쯤 해본다는 최애 드라마 ‘정주행’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멜로가 체질>에는 푹 빠져버렸다. 폴짝폴짝, 넘실넘실 다가오는 명대사와 통통 튀는 이병헌 감독 특유의 ‘사이다’ 연출과 함께 시계가 어디 있는지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멜로가 체질>은 2019년 최고의 흥행작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연출을 맡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대사와 전개 등 여러 요소에서 느껴지는 드라마의 전반적인 느낌은 뭐랄까. 2030에 최적화된 ‘병맛’과 ‘세련됨’을 갖추고 있다. <멜로가 체질>의 여주인공이자 드라마 작가인 임진주(천우희)의 시선에서 들려주는 독백과 촌철살인의 명대사들은, 마치 우리 모두가 <드라마가 체질>인 사람인 마냥 느껴지게 한다.


30대 싱글 맘이자 마케팅 팀장, 드라마 작가, 다큐멘터리 감독. <멜로가 체질>의 여주인공 3명의 프로필이다. 사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군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야기와 대사들은 늘 행복하기를 원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많은 메시지와 생각의 ‘틈’을 선사한다.

“사는 게 그런 건가. 좋았던 기억을 약간 가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꽤나 인상적이었던 대사. 이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좋았던 기억이 거의 없는 경우 남아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힘이 든다는 것을 뜻한다. 2012년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발매되었을 때도 비슷한 베스트 댓글이 대형 음원사이트 게시판의 인기를 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름답게 흩날리는 벚꽃들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년에 고작 3주.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짧은 시간과 공간의 기억들을 소중히 도 간직한 채, 해마다 벚꽃 시즌이 오기를 기다린다(물론, 저마다의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얼마나 벚꽃이 좋으면 그것이 꽃망울을 채 터뜨리기도 전부터 노래로 그토록 찬양을 하며 기다리는지. 그래도 충분히 이해해보기로 했다. 살아가면서, 하염없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커다랗고 소중한 축복임을 알기에!

<멜로가 체질>의 여주인공들은 딱 서른이다. 돌이켜보면 드라마 속 대사도 그러했고, 누군가 또한 이렇게 말했다. 20대에 세상의 낯선 모습과 풍경들 그리고 사람과 일에 부딪히며 성장한다면, 30대에는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긴다고. 흘러가는 일상이 적당히 익숙해지며 보는 눈도 귀도 넓어지고 올라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드라마 속 여주인공 진주(천우희)가 쓰게 된, 편성을 앞둔 드라마 제목이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일지도 모르겠다. <멜로가 체질>에 등장하는 서른의 주인공들. 이들은 말 그대로 ‘서른’이기에 뭐든 괜찮은 걸까? 평범한 주말 어느 오후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서른’을 향해 가기에 아직 3년의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정말 ‘서른’이 되면 괜찮아지는 걸까? 눈 깜짝할 새에 ‘서른’이 되어버린 오늘의 ‘어른’들은 충분히 괜찮은 걸까? 오히려 마흔 되면 괜찮아져요?’라는 물음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의 나를 비롯한, 20대 중후반의 친구들을 바라보면 매일 밤을 지새우는 그 고민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가볍다는 표현이 야속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무게에 짓눌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지독한 우울함을 겪고, 사람을 때로 기피하고,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잘 될 거야.’라는 영혼 없는 유행어는 ‘서른’을 불과 2,3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당장,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닌 듯하다. 말 그대로 밤에 먹어야 건강한 라면이 나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냥 그 정도의 설렘을 느끼고, 이 정도의 위기에 몇 번쯤은 져도 무관한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우리에게 잠들기 전 가장 고통스러운 고민이 그저, 야식으로 먹는 라면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충분하기를.

+ 글을 쓰며 드라마 OST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를 1시간 넘게 들으니, 가사를 벌써 다 외워버린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은 너에게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