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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Dec 11. 2019

365일을 매일 같이 열심히 살 수 없어 일기를 썼다

나는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다.



손이 아픈 글자를 매일같이 꾹꾹 새겨온 것도 벌써 7년이 흘렀다. 딱 갤럭시 노트 10 크기와 비슷한 일기장. 매년 양지사에서 나오는 같은 모델의 수첩을 구입해 사용해왔다. 올해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사건, 인물, 다양했던 이슈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것. 2019년의 일기장도 어느새 마지막 장이 가까워졌음을 문득 깨달은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정말 단 하루의 기록도 누락하지 않고 써왔다. 새로운 회사의 합격 소식을 들었던 기쁜 날, 퇴사를 결심했던 시원섭섭한 날, 하루 종일 이리저리 치여 너덜너덜해진 감정이 적혀있던 아픈 날들까지. 내게 다가온 모든 순간에 펜을 들고 어떠한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듯 굉장히 구체적으로 일기장에 새겨왔다.


2019년의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올해 초에 내가 어떤 생각들을 했으며 누구를 만나 웃고 울었는지 궁금해졌다. 주저 없이 일기장을 한 장씩 앞으로 넘겨가며 기록들을 살펴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주 생생하게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가 모두 떠올랐다(이러한 감정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감정임에 분명하다).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고 맞이했던 9월의 어느 날. 그토록 꿈꾸던 방송국 PD 최종 면접을 봤던 날의 일기를 마주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차분히 기다려보자. 어려운 길이지만 우직하게 잘 달려왔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제발... 할 수 있다!'


그리고 몇 장을 넘겼더니, 면접 탈락 소식이 적혀있던 날의 일기가 펼쳐졌다.


'슬프게 울고 싶지는 않다. 우울이나 슬럼프라는 것조차 내게는 사치다. 살기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아니,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응원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미안하다.'


위와 같은 문장과 박노해 시인의 <별은 너에게로>가 함께 적혀 있었다. 면접 탈락의 충격으로 일기만을 길게 적기는 힘들었던 날이었겠지. 그렇게 일기를 읽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분명 방송국 면접을 보던 날 일기를 적었던 사람은 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과거)' 자신이었다. 당시 면접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기를 적을 때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간절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돈을 주고서라도 미래의 결과를 조금 더 빨리 알 수만 있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채 너무나 가난해서 2019년의 연말에 내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꽤나 진지하게 생각했을 만큼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결국 그 모든 시간들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고, 일기는 꾸역꾸역 채워져 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온전한 상태로 살아있는 오늘의 '나'와 함께. 스스로가 마치 '신'과 같이 느껴졌던 까닭은 나라는 사람의 인생을 일기장 한 권을 통해 환하게 조망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매년 일기를 써왔지만 캐럴이 조금씩 들려오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많은 생각이 든 것은 또 처음인 것 같다. 난 일기를 쓰는 습관을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왔다. 1년 365일을 매일 같이 치열하게 살 수 없으니 일기를 쓴다고. 어떤 날은 하루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몹시도 지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온전히 나의 부족한 실수 때문에 그것을 사수가 온몸으로 막아주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도 무기력하고 바닥이었던 감정을 삼킨 날도 있었다. 급히 돈을 쓸 일이 생겨 다음 급여일을 기다리며 아메리카노 한 잔을 꾹꾹 참아낸 날도 있었다.


군가에게 닥친 고난과 어려움은 평범한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준다 하지 않았던가. 매일을 치열하게 살 수 없었기에 흘러간 하루하루를 솔직하게 반성하며 때로는 뿌듯한 마음으로 남겨왔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하루의 부족했던 부분을 아주 건강하게 채우는 방식이 되었다.


이제는 7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오며 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 '습관'이 되어버린 이 작은 일기장. 마음이 가난했던 날에도 일기장 앞에 앉은 순간만큼은 한 끼를 든든히 먹은 것 마냥 참 넉넉하고 따스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위인이나 셀럽이 되어야만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 우리가 각자 살았던 모든 순간을 남기는 일기가 충분히 극적인 드라마 대본이 되고,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남을 수 있으리라.



오늘은 2020년의 일기장을 샀다. 늘 쓰던 것으로. 그리고 잉크가 흐르고 마르기를 반복하며 꽤나 두툼해진 2019년의 일기장을 바라봤다. 올해의 이것이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제목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음... 이렇게 지으면 딱 좋을 것만 같다. 내게 남아있는 2019년의 시간 사이에 어떤 기적이 또 일어날지 모르니!


'이 멋진 드라마의 제목은 아직 없습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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