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나무

여섯 개의 별

by 산연랑




천선란 작가님의 경장편 소설 <랑과 나의 사막>을 읽고 만든 음악이다. 시월 말, 신간 소식과 함께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서둘러 읽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11월초에 예정된 캐나다 여행 때문에 혹시나 배송을 늦게 받으면 어떡하지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출국 바로 전날(일수도 혹은 당일일수도) 책을 받을 수 있었다.

'랑과 나의 사막'은 지금까지 나온 작가님의 소설 중에서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소설이다. <어떤 물질의 사랑> 단편집에 수록된 '사막으로' 라는 단편소설은 내가 늘 낭만적으로 여겼던 사막의 이미지를 훨씬 더 넓게 퍼트려준 소설이었고, 그래서 이번 신간 제목에 붙은 '사막'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또 얼마나 광활하고 외로울까 기대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작가님이 그려내는 사막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상상하는 낭만적이고도 고독한 곳을 작가님의 글로 바라보고 관찰하는 행위를 좋아하는 걸지도.

캐나다 여행에서 들고 간 책은 '랑과 나의 사막'과 공룡에 관한 책이었는데 결국 읽은 건 '랑과 나의 사막'뿐이었다.

책의 실물을 처음 봤을 때 생각보다 두껍지 않아서... '작별인사'처럼 정말 정말 아껴읽어야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인천공항. 출국 전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읽기 시작했고 비행기를 타고 미니애폴리스 공항에 도착해 그다음 비행을 기다리기 직전에 또 잠깐 읽었다. 그리고 캐나다에 도착하고부터 약 이틀 뒤, 완독을 했다.

3주간의 여행 동안 아껴 읽으려 했지만 다짐은 그렇게 쉽게 가지 못했다. 이유는 또다시 간단했다. 재밌어서. 캐릭터의 발걸음을 독자인 내가 멈출 수가 있으랴... 싶었다.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



첫 홀로 여행이었던 캐나다는 앞 글에 언급했던 것처럼 행복했다. 점차 곁에 있는 무언가들이 더더욱 확실해졌고 나에게 여행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기억의 뿌리를 잘 심어뒀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 지구 바깥까지 자라게 할 정도로 다시 심어, 그 줄기들을 타고 우주로 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외계인을 만날 거라고 다짐했다. 몇 개월 남지 않은 편입 시험 또한 전보다 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시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결과는 나중에 생각하라지! 마음으로..) 오로지 나만을 챙기며 지냈던 캐나다에서 운 좋게 늦가을과 첫눈을 경험했다. 롱패딩 하나로 추위를 견뎌내며 바람이 시리게 부는 날에도, 손이 꽁꽁 얼어가는 와중에도 카메라를 놓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보는 것들을 카메라로는 다 담아낼 수가 없겠구나... 그렇지만 멈추기는 싫었다. 기억과 기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찍는 것일 테니까.

3주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나무를 보는 일이었다. 나무는 집 앞 근처 5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공원에 있었는데 캐나다에 도착하고 나서 근처를 탐색할 겸 내 발걸음에만 집중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좁은 잔디밭과 놀이터, 그 옆에 우뚝 서있는 나무 한 그루. 나무 앞에 위치한 테이블. 그곳에서 '랑과 나의 사막'을 읽었다.


*스포주의

이틀 차 아침에 맥도널드에서 팔았던 도넛, 그리고 알록달록한 베이글과 음료수, 카메라, 그리고 '랑과 나의 사막'을 챙겼다. 또다시 테이블에 앉아 아이유의 노래만 들으며 고고의 모험의 끝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살리가 자신의 친구인 나무를 소개하는 장면과 지금 나의 앞에서 우뚝 서있는 나무가, 내가 상상하는 나무와 매우 닮아보였다는 것이었다. 읽고 있는 책을 떨어뜨릴 뻔할 정도로, 나의 상상을 현실에서 포착한 순간이었다. 내가 상상한 나무는 버드나무였었는데 그때 그 공원에 우뚝 서있던 나무도 버드나무였다. 너무 신기해서 나는 서둘러 카메라를 들었다. 몇 시간 동안 그 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찍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굉장히 신기하고 재밌어서 추운 지도 까먹고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 순간을 생각만 해도 그때 캐나다의 시린 공기가 곧바로 나를 찾아온다.

집으로 가야지, 하며 일어났던 나는 문득 더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 반대쪽으로 걸었는데 놀이터에서 약 1분 거리에 위치한 아래가 움푹 파인 잔디밭이 보였다. 언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워낙 크기가 작고 좁아서 언덕이라 부르기엔 모호했다. 나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잔디밭 가장 끝에 방금 본 나무보다 더 큰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나무야말로 내 상상 속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나무였기 때문이었다.

3주 중에서 일주일 반 동안 나는 그 나무를 보러 공원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눈이 쉴 새 없이 내려 잔디밭엔 어느새 흰 눈가루만 뿌려져 있었고 다른 나무들은 나뭇잎이 다 떨어지기 바빴는데 그 나무만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이유의 노래만 반복재생으로 틀어놓고 나는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었다. 그때 내가 본 사막 속 나무를 조심스럽게 올려본다. 운이 좋았던 건지, 늦가을과 첫눈 속 나무를 포착할 수 있었다. (저화질이라 아쉽지만...)


무척이나 행복했던 캐나다의 여행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작별인사' 작업을 열렬히 하고 있었다. 다행히 새해가 오기 전에 완성할 수 있었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업로드를 하고 난 뒤 '이젠 진짜 끝이다!' 하며 속으로 소리쳤다. 나에겐 아직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새 작업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내기 싫은 12월의 끝자락으로 달려가고 있을 즈음에, 누군가 계속해서 나를 두드렸다. 그게 누구였는지 나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말은 '아직 남았다.'였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무엇이 남았다는 건지도 알 수 없는 채로 찝찝하게 있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나에겐 남은 것이 있다.

내가 더 이어야 할 음악이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내 손으로 이어야 할 음악이다.

내가 작별인사 말고도 꼭 남겨야 할 음악이라면, 인물의 발걸음을 지금 포착해야 한다면, 나는 과연 누구의 발걸음을 따라갈 것인가.

정답은 하나였다.


나는 고고를 이어야 한다.


고고의 어떤 점을 이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음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내 삶에 깃들어온다. 고고의 이야기가 2022년 나에겐 그랬다.

그래서 12월 31일 바로 전날 30일, 낮부터 작업실에만 찌들어 있었다. 음악을 다 만들 때까지 나는 절대 나갈 수 없다! 속으로 다짐하며 책을 꺼내들었다. 과연 나는 어떻게 고고를 그릴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고만 그려야 하는 걸까.'

그때 당시 내 머릿속에 세게 박힌 그림들은 마지막 고고가 바람에 휩쓸리는 것이었고, 살리의 친구인 큰 나무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작업 초반엔 마지막장만 반복적으로 읽기 바빴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고고만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고고만 그릴 수가 없었다. 고고의 목표였던 '랑'이 빠질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랑과 고고가 같이 있는 여러 순간들 중에서 어떤 순간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답은 다행히도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내가 좋아했던 순간을 찾으면 된다.

이야기나 소설을 보고 읽으면서 좋았던 문장이나, 너무 재밌고 신비로워서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순간들이 올 때 나는 줄을 긋는다. 어떤 장면은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긋는 편이다. '랑과 나의 사막'의 경우엔 전자였다. 좋았던 문장보다는 도무지 지나칠 수 없었던 랑과 고고의 모습이 어디었을까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고, 내가 그어놓은 장면은 바로 랑과 고고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장면이었다. (p.84-86)


장면은 나왔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멈추지 말고 두드리기.

'파도야 놀자' 때처럼 이 이야기는 4/4 박자보단 3/4 박자로 하고 싶었다. 이유를 말해보자면 랑은 4/4박자보다 3/4 박자인 사람처럼 느껴져서였다.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하고 싶었는데 내 의도와 가장 근접하고 간결한 말이다... 어딘가 진지하고 어딘가 엉뚱하며 지구 밖 어딘가를 꿈꾸는 랑의 발바닥 같달까.

멜로디의 맨 첫 음은 '파'다. 도레미파솔라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은 '파'다. 어릴 땐 검은 건반 소리를 더 좋아해서 Bb 음을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음이다.

'파' 소리를 가장 좋아하는 건 그 음의 이름을 발음할 때 상상하고 생각나는 것들이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파랑, 파도. '파' 소리는 어딘가 꼿꼿하고, 정직하며 바른 소리가 나다가도 어딘가 뻣뻣하고, 뒤틀려지는 재밌는 소리를 다 가지고 있는 거 같아서. F키를 자주 사용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 음악에도 F 코드가 들어간다. 하하.


이 음악의 핵심의 소리는 '하프'라고 생각한다. 클라리넷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프가 없었다면 나는 이 작업을 완성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거의 다 작업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완벽하게 고고와 랑을 그릴 수 있는 악기가 있을 텐데. 그 악기가 클라리넷이라고 생각했지만 클라리넷을 덧붙여봐도 어딘가 아쉬웠다.

클라리넷과 현악기가, 랑과 고고가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이었다면 나는 그 밑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랑과 고고를 그려야 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악기를 다 써봤지만 마음에 드는 건 없었고 마지막 찰나에 든 생각은 '하프'였다.

하프가 낼 수 있는 저음의 소리에서부터, 코드진행에 맞게 천천히 올라가며 음을 찍었다. 다 찍고 나서 모든 악기를 합쳤을 때, 나는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프의 저음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가볍기만 할 줄 알았던 하프는 생각보다 묵직했고, 두꺼웠다. 그래서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하프의 연주소리에 집중하면서 듣는다.


나에게 <여섯 개의 별> 은 뜻밖의 나무 같다. 소설 속 살리의 친구, 나무를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그 신비한 경험을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이 또렷하게, 또 흐리게 느껴지길 바란다.


https://youtu.be/ZlNhqVILMbQ

twitter : @yeonran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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